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나네 Oct 09. 2023

봄단풍 닮은 사랑


한 달 전 옆집할아버지가
 큰 종이백을 맡겼다.


그리고 할머니 생일 전날에 문자를 보내셨다. 할머니가 산책을 나가는 오후 네 시경에 백을 찾으러 온다는 텍스트였다. 우리 집 문 앞에 오신 할아버지는 소년같이 설레는 모습이었다. 내가 문을 열자  덩치가 꽤 큰 그가 신이 나 있었다. 어느덧 서로 가까워진 이웃이 된지라, 내 앞에서 댄스를 추는 흉내까지 내다. 아내를 놀라게 하실 꿈에 차올라 있었다. 나도 호홋 웃으며 손뼉을 쳐 드렸다.


매번 고명딸이 모님생일을 알뜰히 챙겨드렸는데, 이번엔 님이 쓰리커플 프렌즈끼리 한 달 동안 유럽여행 중이다. 그, 그 생일을 담당할 주체 되다. 책임감이 이 세상 누구보다 더 강하 인정 넘치는 그는, 벌써 한 달 전부터 아내를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살부터 알고 지낸 70년 지기 사랑하는 누이를 위해 나름, 황홀한 이벤트를 기획한 거다. 이렇게 호주의 봄단풍이 일흔 번이나 물들어 낙엽이 지 봄잎이 , 그들 또한 여전히 아늑한 사랑 중이다.



 그가 가방을 찾으러 오기 전, 내 딸과 나는 장난기가 발동하였다. 그가 맡긴 그녀 핸드백 가격이 궁금해졌다. 딸은 홈피에 들어가고, 난 종이가방 안에 행여 영수증이 있을까 뒤져보았다. 250불 짜리니, 우리 돈 22만 원 정도 되는 붉은 브라운칼라 핸드백이었다. 그가 녀와 같이 숍에 갔을 때 솔드아웃되었던 그 백을, 한 달 전부터 그녀 몰래 구입하여 우리 집에 숨겨두고 있었던 거다. 리고,


그녀 생일날 플렌을
우리에게 이야기했다.

 

생일날 새벽, 고작 15불짜리 로또와 카드를 그녀 머리맡에 놓아두고 운동하러 짐에 갈 거란다. 동전으로 긁어 꽝이 나올 확률이 농짙은 복권 앞에서, 그녀가 붉으락푸르락하기 시작한다. 허번드에 대한 실망과 절망과 미움이 가득할 시간인, 오전 아홉 시에 림보 거북이처럼 그가 귀가다. 그녀의 반짝거리는 눈빛만큼이나 따가운 지청구를, 시침 뚝 떼고 끝까지 듣는다.  그러다 그의 야심작 그 비싼 백 짜잔, 하며 내놓아 서프라이즈 할 거다. 우린 손뼉을 치며 그의 이벤트를 미리 환호했다.


그녀를 향해 단풍처럼 발갛게 물든 사랑을 꺼내놓고, 그는 노란 웃음기를 남기고 그녀의 선물가방을 들고 가셨다. 딸과 난 서로 마주 보고 후훗 웃었다. 시스터와 브라더처럼 오손도손 살아가시는 올드커플, 그러나 스물한 살 커플인양  두 분의 사랑이 그저 흐뭇하고 즐거웠. 두 분의 사랑이,  되김없이 랗고 발갛게 물들이다 보내 초록의 새잎을 시나브로 이하 보헤미안이라는  나라 무를 닮았다. 아늑하고 참신한 오래된 나무 같았다.




나는 할머니를 위해 연한 그린빛 블라우스를 사두었다. 그리고 연보라색으로 뜬 파우치와 함께, 핑크색 기프트백에 담아서 전날 전해드렸다. 할아버지와 셋이서 미리 해피버쓰데이 송을 부르고 난 후, 할머니 볼에 입을 맞추고 손에 쥐어드렸다. 두 분이 흡족하며 좋아하시니 내 마음도 꽃인양 흐뭇해졌다. 그녀가 생일날 아침에 풀어보고 고맙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사실은 망설이다 선물을 드렸는데, 하기를 참 잘했다고 나 자신을 스스로 칭찬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 생일날 이른 아침에 이웃 린할머니가 나한테 귀띔하러 일부러 오셔서 일러주셨으니(미리 알고 있었지만, 그녀에게 감사했다.), 잠겨있던 내 마음의 빗장을 풀기를 잘한 거다. 하마터면 두고두고 안하여 후회할 뻔했다.


그는 그녀를 위해 세 집의 이웃을 초대하였다.


생일날 저녁 다섯 시에, 세 이웃이 생일파티에 손도손 모여 그가 쏜 피자를 먹었다. 각자 들고 간 포엑스 비어, 하이네켄, 진저비어를 앞에 둔 채 정담을 나누고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이웃들에게 지나간 해프닝을 익살스럽게 이야기하셨고, 할머닌 수줍은 듯 눈빛을 반짝이며 할아버지를 바라보고 계셨다. 나의 네이버이자 프렌즈, 그 두 분이 올해 벌써 여든 사세가 되셨다니, 믿기지 않는다. 두어 시간 후 헤어지면서, 우린 한 사람씩, 그녀에게 깊은 포옹을 하여 다시 한번 축복해 드렸다. 그녀는 나를 한참 동안 꼭 껴안으며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난 두 분이 오래,
 건강하시길 빌었다.



오늘 찍은 보헤미안이라는 이 나무는 봄단풍으로, 아늑하고 참신하게 이곳 봄의 전령사 역할을 한다. 잎이 순하게 둥글납작한 게 두분의 사랑을 닮았다고 난, 생각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꼬마 율동 선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