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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림 Dec 06. 2021

성탄절 편지

-자작시

성탄절 편지/ 한상림


1980년 유난히 추웠던 겨울

털장갑과 목도리를 사들고 신탄진으로 꽃할머니를 찾아갔다

꽃할머니는 기도를 하시면서

날더러 아랫목에 누워 한 숨 자라고 하셨다

묵주 한 알 한 알 기도 속에서 나는 이미  첫사랑의 아내였다

기도를 마친 할머니는 꽃밭을 가꾸느라

손가락 끝이 뭉툭해진 E.T 손가락으로

연탄불에서 갓 구운 김과 하얀 쌀밥 위에 조깃살을 얹어주셨다

할머니와 헤어진 후

나를 보고 싶어 하는 할머니를 한 번만 찾아가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이사하신 새 주소를 들고

떨리는 걸음으로 보문산 그와 함께 걸었단  길을

물어물어 찾아가 보니

할머니는 성당에 가서 안 계셨다

두 번이나 허탕을 치고 돌아오면서

‘할머니, 오래오래 사세요. 못 뵙고 그냥 갑니다. 죄송해요'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사탕과 귤을 봉투에 담아놓은 채

편지 한 장 써 놓고 돌아왔다

지금도 성탄절이 돌아오면 할머니에게 편지를 쓴다

“김연화 아녜스 할머니, 보고 싶어요, 무척이나”




참으로 아릿하고 그리운 추억이다.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그리워지는 김연화 아녜스 할머니,

1980년 겨울, 첫사랑과 함께  신탄진 역 부근에 사시던 꽃집 할머니 댁에 처음으로 인사를 갔었다.

할머니는 하얀 쌀밥과 연탄불에서 갓 구운 김과 조기로 밥상을 차려서 주셔서 맛있게 먹었었다.

그리고 따스한 아랫목에 누워서 한숨 자라고 하시면서 묵주기도를 하셨다.


꽃집 할머니 김연화 아녜스

할머니의 열 손가락 끝은 모두가 E.T 머리처럼 뭉툭하게 닳아 있고, 허리도 굽으셨다.

동네 사람들은 그녀를 꽃집 할머니라고 부른다 했다.

자그마한 시골집 마당에서 꽃을 가꾸고 바지런하게 일을 하시던 아녜스 할머니는

첫사랑의 외할머니다.

6.25 때 북한에서 내려와 이산가족이 되셨고,  어려운 살림에 자식들 뒷바라지에 뭉그러진 손끝,

첫사랑의 어머니도 어려운 살림에 애달픈 사연을 가지신 분이다. 북한에서는 아주 잘 살다가  빈 몸으로 남한에서 살기가 녹록지 않아서 많은 고생을 하며 사셨다고 하였다.


"얘야, 나는 네가 참 좋다. "면서 "너의 시아버지는, 시어머니는....." 하시면서 마치 우리는 이미 결혼한 사이로 할머니에게 나는 맏외손주 며느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시면서, 돌아가시더라도 자식들에게 짐이 되시지 않으려고 돈을 모아서 성당에 연미사 기금을 이미 넣어 놓으셨다고 하셨다.  그 당시 나도 성당에 다니고 있을 때라서 할머니에게 성탄절 선물로 털장갑과 목도리를 사다 드렸었다.


2년 후, 우리는 이별을 하게 되었다.

남편과 약혼식을 마친 후, 나는 해외 근무를 나간 약혼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주 주말마다 데이트를 하면서 행복했던 시간에 이별을 한 후에도 주말마다 논산에서 대전인 집으로 오갔을 첫사랑,

그는 공립고등학교 교사였고,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군 복무를 연기한 동갑내기 스무 살에 만났던 아주 순수한 사랑을 엮어갔던 사람이다. 6년 7개월 만에 이별을 하게 된 그와의 추억을 지워가며 남편에게 편지를 매일 썼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외할머니가 보고 싶어 하시니, 한번 찾아가 뵈었으면 한다고..."

할머니가 혼자 지내시기 힘드셔서 외삼촌댁에 계시니 그곳에 가면 뵙는다면서 주소를 주었다.

보문산 속에 있는 외삼촌댁은 그동안 그와 내가 매주 만나서 걸었던 산책로 안쪽에 자리했다.

나는 할머니 사진을 찍어드리려고 카메라를  두 번이나 가서 허탕을 쳤다. 그때 만났었다면 사진 한 장은 꼭 간직했을 건데...

할머니는 매번 성당에 가셔서 안계셨기 때문에 만날 수가 없었다.  그당시는 거의 집에 전화가 없어서

사전에 연락을 할 수가 없었던 아날로그 시절이다.

외삼촌댁 자녀인 어린 아이들에게 할머니 소식을 듣고 마지막으로 종이에 큰 글씨로 편지를 써서 작은 선물과 함께 전달해 주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가지 않았다.

가까이 지내던 친구에게 을 했다니  혹시 시댁에서 이런 사실을 알게되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스런 말을 하였기 때문에 더이상 방문하기가 두려워서 가지 못한게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김연화 아녜스 할머니와 함께..."

그 당시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마다 "이 세상을 떠난 교우 김연화 아녜스 할머니와 함께..."라고 기도를 하였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서 이제는 내 곁에서 떠난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다. 아들도, 친정 아버지도,시아버지도, 시아주버님도....)


하늘나라 계신 김연화 아녜스 할머니께

아녜스 할머니,

아직도 그때의 할머니가 제 가슴 속에 함께 계십니다.

여전히 보고 싶습니다.

그때 편지에다 약속 날짜를 정해서 한번만 더 찾아뵙지 못한 걸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이라는 걸 알면서도 머뭇거리다 놓쳐버려 영원히 만나지 못한 만남,

우리가 헤어진 줄 알면서도 꼭 한번 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제 불찰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할머니,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는 날 그때로 돌아가서 다시 꼭 만나고 싶습니다.

너무너무 죄송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사진-작가 이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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