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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림 Nov 13. 2021

돼지님, 열반에 드시다

- 자작시

돼지님, 열반에 드시다 / 한상림



한 생이 통통 불려 나왔다

무쇠솥 안에서 다비식을 마친 후
은쟁반에서 땀을 식히고 있는 토종순대,
무쇠솥은 한 목숨을 부풀렸다가

다시 팽팽하게 당겨 놓았다
돼지의 내장을 떠올려 본다
또 다른 내장에게 포만감을 주려고
자꾸만 비워내고 채워가며

새 길을 만들어가는 위장의 습성

마지막까지 목숨이 끊어지면서 흘렸을

뜨거운 혈액을 새 길에 밀어 넣으면
긴장된 것들이 아무렇게나 엉킨다
뒤엉킨 것들 사이에서 겉도는 것들은
하얗게 질려 허공으로 새어 나오고,
끝까지 잡식의 근성을 놓지 않으려 돼지는
불룩한 창자 양 끝을 불끈 움켜쥔 채
앙탈지게 버텨보는 것이다

팽팽한 긴장감이 부풀어 오르고 있을 때
순댓국집 창 밖에선 슬며시 눈발이 날리고
마지막 생을 내려놓던 순간까지 쌔액 쌕
사그라들던 돼지의 신음이 들려온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편안한 안식이
제법 진지하게 삭어 가시는 중이다




2012년 11월 첫눈이 내리던 어느 날,

길동 시장 골목 입구를 지나치다가 우연히 순댓국집에서 갓 삶아놓은 순대가 쟁반 위에서 하얀 김을 해내는 것을 보았다. 돼지는 평생을 먹고 잠자면서 살을 찌우다가 사람에게 육시 보신을 하고 내장과 피, 머리까지 온통 다 내주고 사라진다.

돼지머리로는 고사를 지내니, 죽어서도 웃어야 하는 돼지의 한 생이 마치 다비식을 마친 후 쟁반 위에서  편안한 안식을  취하는 모습으로 읽혔다.

 

내장의 습성은 비우면 다시 채우고, 채워지면 다시 비워내야 하는 반복의 길이라 할 수 있다.

돼지처럼 지금 우리가 움켜쥔 것들은 무엇일까? 하면서 잠시 모두 내려놓고

비워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써 놓았던 시이다.


끊임없이 비우고 채워야 하는 돼지,

돼지는 평생을 바닥만 내려다보고 살다가 죽어서야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짐승이다.

행여 돼지처럼 인간의 욕망도 끊임없이 하늘의 뜻을 읽지 못하고 바닥만 내려다보면서

욕망의 주머니에 무언가를 자꾸 채우려 하는 건 아닐까?


<표지 이미지는 다음 이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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