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그 때의 소녀
김원숙/ Divided County/1983/60*60/Oil/Wood
소녀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구한다.
열매를 향해 두 손을 하염없이 벌리고서.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에 올라가서
그 열매를 따가지고 올 용기란
소녀에게 사치인 것일까.
나무의 그림자가 소녀를 가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소녀는 그 나무가 지레 하늘에 닿을만치 높다고 생각해 버린다.
아, 이렇게 손을 벌리고 있다보면
언젠가는 저 열매들이 내게 떨어질거야.
소녀는 확신하고, 또 확신한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난다.
쥐가 나다 못해 이제는 그 상태 그대로 굳어버린 소녀의 팔에, 손바닥에
찌릿한 느낌이 온다. 아, 첫눈이구나.
그제야 소녀는 겨울이 왔다는 것을 안다.
왜 겨울이 왔는데 열매는 떨어지지 않는 것일까.
갑자기 그 사실이 궁금해 진다.
그러다 발이 시려워진다.
발에서부터 풍기는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스민다.
피가 나는구나, 맨발로 오래도록 까치발을 딛고 서있어서인지
피가 난다. 나다못해 발 밑에 굳어서 딱딱해져 버렸다.
빨리 발을 지혈해야 하는데. 손을 내릴 수가 없다.
손을 내린다는 것은,
곧 열매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일년이나 기다려왔던 열매가 아니던가.
발을 치료하고 싶은 마음 반,
곧 겨울 바람에 열매가 썩어 문드러진 것일지라도 떨어질테니
기다리고픈 마음 반.
어찌할바를 몰라 버둥대기만 한다.
그렇게 겨울이 가고, 봄이 가고, 여름이 간다.
나무 위에 올라가서 열매를 따볼까?
아니야. 혹시라도 나무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언젠가는 떨어지겠지.
그렇게 소녀는 다시 기다리기로 한다.
매번 그렇게,
소녀는 '언젠가는'이라는 말로 지금의 상황을 합리화 시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만 덩그러니 내민채
세월을 보낸다.
할머니가 되었을 때
소녀는 그 나무 위에 올라가보기로 결심한다.
아니, 이제는 소녀가 아니라 할머니가 되어버린 소녀겠지.
죽을 때가 되었는데도 열매는 떨어지지 않는군.
이제는 나무 위에서 떨어지는 것도 두렵지 않아.
외려 빨리 죽지 않는게 문제지.
할머니는 나무를 타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무 위에 다 올라가 열매를 한 입 베어문다.
평생을 기다려온 열매는 생각 했던 것만치 맛있지 않다.
문득 내려다 본 바닥은 생각 했던 것만치 멀지 않다.
한 번 쯤은 올라가볼만도 했고,
떨어져 볼 만도 했던 나무.
그저 그런 열매의 맛.
용기만 있었다면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죽음에 이르러서야,
깨닫게 된 허망한 시간들.
우리는 작은 열쇠구멍으로 그녀를 지켜본다.
어쩌면 저 열쇠구멍은
내 마음 속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저 소녀는
어쩌면 내 자신이 아닐까.
문득, 두려워 지는 오늘.
2009.09.27
나는 저 소녀 보다, 그 시절의 나 보다
나아졌을까, 아니면 그대로 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