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노래방, 그리고.
나와 남동생은 2살 차이가 난다.
보통 남매들 처럼 치고 박고 컸으나 미운 정이 되었고,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대단한 사람' 취급해 주었기에 우리는 보통 보다는 조금 더 돈독하게 지낼 수 있었다. 5년 전쯤 부모님이 하던 일을 모두 접고 충주라는 도시로 내려 가시면서 룸메이트가 되었다. 자유를 얻은 우리는 미친듯이 놀아댔고, 서로의 놀음을 부모님께 커버 쳐주면서 팀플레이의 결속력을 획득 했다. 우리의 대동단결은 부모님이 오실 때 주로 효과를 발휘했고, 지금도 그렇다.
동생은 여섯살때 부터 미술을 시작해서 컴퓨터 그래픽을 전공하고, CG일을 하다가 돌연 회사를 때려치웠다. 소주 한 잔을 앞에 두고 "미래가 없어." 라고 동생은 말했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그의 얼굴엔 한 톨의 미련도 없었다. 앞으로의 살길에 대한 고민만 꿈틀 거렸을 뿐. 남편이었다면 걱정이 앞섰을지도 모르지만 남편 같은 동생에겐 "관둬!" 라고 호기롭게 대답했다. 다음 날 아침까진 괜찮았으나 5개월을 컴퓨터 앞에서 광클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한숨이 났다. 왠지 늙어 죽을 때 까지 저 모습 일 것 같았다. 다행히 동생은 전혀 다른 분야에 취직했다. 오래 오래 붙어 있었으면 좋겠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끼리 술을 한잔씩 하는데 술은 먹고 싶으나 멀리 나가고 싶진 않고, 한 사람이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을 때 주로 회동이 이뤄진다. 꿩 대신 닭. 꿩고기 보단 닭고기가 더 부드럽고 맛있을 때가 있다.
동네 횟집에서 술을 한 잔 하고, 집에 가려고 했는데 노래방을 가잔다. 노래방에 가면 애국가만 부르던 녀석이 사회 생활을 시작한 뒤부터 맛을 들였다. 사회 생활이란 그런거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소리라도 지르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은 빡빡함.
동네 단골 노래방의 각자 다른 방에서 나오다가 마주 친 이 후 우리는 같이 노래방을 다니기 시작했다. 부모님이랑 같이 살 때는 미친 듯이 서비스를 넣어 주시는 고마운 주인 아주머니 덕분에 우리 핸드폰에는 불이 났으나 이제는 그럴 일이 없다. 새벽 두시. 흔쾌히 가기로 한다.
주변 사람들과 노래방을 가면 부담감들이 있다. 삑사리나 버벅댐을 하지 말아야 할 것 같은. 그러나 동생과는 그럴 일이 없다. 한 뱃속에서 태어난 사이다. 마라톤 하듯 내내 노래를 불러댔다.
'내려 놓을 수 있는 사이'가 이 녀석 말고 또 있을까 싶다. 인간관계가 어려워지는 것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적당한 거리를 두기 위함이고, 그러기 위해선 너무 나를 까발리면 안된다는 것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계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 하물며 가족인들.
복 받았다. 집에 들어와 휴지조각에 끄적인 저 그림엔 오늘 밤의 흥얼거림이 들었다.
좋다. 좋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