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블루스, 혹은 그저 블루스.
2015.02.17 생각, 생각
김윤아의 도쿄블루스라는 노래를 좋아한다.
순간의 사랑을 나눈 뒤의 허무함, 또 다시 외로움에 젖어 사는 이의 감정들이 오롯이 오분이 채 안 되는 노래에 젖어 있다.
나는 늘 사랑을 찾아 헤맨다. 사랑을 하고 싶고, 받고 싶다. 사랑이란 것이 나를 온전히 채워 주지는 않지만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술로도, 담배로도 채울 수 없는 몇 퍼센트의 위로가 되니까. 맘에 드는 사람이 나타나면 사랑에 저돌적이고, 솔직해지고 싶지만 나이가 들수록 사랑에 소심해진다. 사실 나이에 관계 없다. 나이에 맞춰 쌓아가는 쓰라린 경험이 많아지면 많아질 수록 표현하는 것에 조심스러워 지고,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것에 있어서 많은 생각이 든다.
이별을 몇 차례 겪고 나서 나는 한동안을 폐인처럼 지냈다. 내가 먼저든, 그가 먼저든 이별을 통보한 이에 관계없이. 술독에 빠져 살거나 앉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한 달 간을 TV만 쳐다보고 있었다.
지나간 사랑에 대한 후회와 미련, 이별이란 과정에서 얻은 마음의 생채기들엔 연고가 없었다.
시간만이 약이라 허무함을 가득 채운 시간이 흘러가면서 나는 '사랑'에 대한 두려움이 돋아났다.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준다는 것.
수많은 기대와 환상들이 쨍그랑, 쨍그랑 깨져가는 모습들이 마음을 주기도 전에 먼저 되새김질 된다.
'사귄다'는 규정 속에 들어가면 '맞춰간다'는 복잡한 과정들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부담스럽게만 느껴지고, 어느 순간 내가 상대를 배려하기 보다는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내가 뭘 하고 있는건가.'하는 생각들이 싫다.
그래서 나는 대담해졌다.
떠나가고, 거절 당하며 생채기가 나는 것이 두려워
소위 '사귄다'고 말하는 규정된 관계 뿐만이 아니라 단 하루 동안 잠시 잠깐 사랑을 나누고 서로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것은 소심함에서 비롯된 대담함이다. 때로 남들은 "어머, 어떻게 그럴 수 있니?"라고 말하지만 서로의 필요에 의한 관계이므로 남들의 시선 따위는 중요치 않다.
육체적 관계에서 정서적 교류는 좋지만 마음을 주고, '이 사람이 언젠간 내 남자가 되겠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남는 것은 허무함 뿐이다.
아침이 찾아오면 남자든 여자든 어제의 그 달콤한 말들은 신데렐라의 마법 같은 것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현실에서는 구두를 찾아 줄 왕자는 없다. 내 구두는 이미 술 기운이 깰 새벽녘 즈음에 분리수거 차에 실려서 사라졌다. 분리수거라도 된다면 다행이다.
친구들의 청첩장을 받을 때 마다 결혼이라는 제도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그럴 만한 남자도 없고, 자신도 없다. 사랑이 하고 싶지만 인연이 없다. 외로움에 휩싸이는 밤이 찾아온다.
그래서 나는,
이 노래를 듣는다. 블루스를 춘다.
이 마법도 언젠간 끝이 나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지만
사랑이 하고 싶다.
역설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