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 세월을 넘어 만난 인연
시간이 갈수록 신라군은 백제군을 포위하면서 점점 좁혀 들어왔어.
백제군은 오랜 싸움과 굶주림에 지쳐 항복하는 이들도 있었어. 하지만 바우는 요지부동이었지.
자신이 항복하면 누이를 지킬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어. 누이를 적군에게 넘겨주는 것 같아서 죽더라도 항복은 못하겠노라고 버텼던 거야.
나는 바우를 지켜 주어야겠다고 결심했어. 나의 넓은 품으로 바우를 안아 적군으로부터 보호해 주어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어. 설사 내 몸이 깨어져 산산조각 나더라도 그 일은 해야만 했어.
마침내 운명의 날은 오고 말았어.
코앞까지 들이닥친 신라군들 앞에서 백제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지. 어차피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던 거야.
소낙비가 오듯 화살들이 날아다녔고 백제군은 가을바람에 낙엽이 뒹굴 듯 여기저기 쓰러지기 시작했어.
바우는 두려워하면서 나에게 몸과 마음을 의지하며 숨어 있었지.
아아, 난 정말이지 바우를 내 품에 꼭 안아 보호하고 싶었어. 조금의 상처도 입히지 않게 하고 싶었어.
그러나 그날 밤, 바우는 적군의 화살에 가슴을 맞고 말았어.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바우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희뿌옇게 내 시야에 들어왔어.
바우는 마지막으로 내 몸을 잡고 신음소리를 냈어. 마지막 남은 힘을 내게 바치겠다는 듯 강하게 내 몸에 자신의 몸을 비벼댔어.
바우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내 밑으로 스며드는 것을 비로소 느꼈어. 아직도 따스함이 가시지 않은 그 피가 내 몸을 적시기 시작했어. 바우는 어머니와 누이를 부르며 죽어갔어.
백제가 멸망하고 궁녀들이 모두 낙화암에 몸을 던졌다는 사실을 듣게 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야.
나는 그 소년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렸어. 천 년이 넘는 세월을 가슴에 묻어두었던 아픔이 다시금 고개를 쳐들었지.
바우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시달려왔는지 몰라. 세월이 흐르면서 상처는 조금씩 무뎌졌지만 완전히 아물었던 건 아니야.
하지만 소년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어.
아, 이럴 때 내가 한 곳에 뿌리박고 있는 바위가 아니라 새나 바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당장에라도 소년을 찾아 훨훨 날아다녔을 텐데.
꽃잎이 져버리듯 계절도 져버렸어. 얼굴에 푸른 물이 들도록 산을 푸르러졌어. 햇살은 뜨거워지고 계곡의 물은 투명한 얼굴을 한 채 돌돌돌 소리를 내며 흘러갔어.
아침이 점점 빨라지던 어느 날 나는 마침내 그 소년을 다시 만날 수 있었어. 역시 아버지와 함께였지.
소년은 자석에라도 끌리듯 내게 가까이 오기 시작했어. 이런 경우를 이심전심이라고 하는가? 소년은 마치 내 마음을 읽은 것 같았어.
"왜 자꾸 그리로 가니? 산에 오르려면 멀었는데....."
아버지가 말렸어.
"더워요. 여기서 좀 쉬었다 가요."
"갑사까지 가려면 한참을 가야 하는데 여기서 시간 보내면 안 돼."
"계곡물이 너무 맑은걸요. 보세요, 물고기도 사나 봐요."
소년은 신이 난 듯 계곡물을 들여다봤어. 맑은 물 위에 소년의 동그란 얼굴이 비쳤어.
나는 반가움에 소년의 팔이라도 덥석 잡고 싶은 마음이었지.
소년이 내 몸에 털썩 앉더군. 소년의 따스한 체온이 내 몸까지 스며들었어.
소년은 신발을 벗더니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찰방거렸어.
아버지도 할 수 없다는 듯 소년 옆으로 다가왔어.
더위 때문에 노을빛으로 달아오른 소년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지.
"아빠!"
"응?"
"계룡산이 공주에 있는 산이죠?"
"그렇지."
"학교에서 배웠는데 공주가 백제의 도읍지였대요."
"맞다. 백제의 도읍지는 세 군데나 된단다. 처음에는 서울이었다가 그다음에는 공주로 옮겨졌고 마지막으로 부여가 되었지."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햇빛이 비껴가는 먼 산을 올려다보았어.
"백제에 대해서는 별로 배운 기억이 없어요."
"백제가 패망국이었으니까. 역사란 승자의 편에서 기록되는 거란다.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리기는 했지만 삼국통일을 했잖니? 그러니까 모든 것이 신라 입장에서 기록될 수밖에 없지. 더구나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이라는 신하도 신라의 후손이었기에 신라 위주의 역사책으로 만들어지게 된 거야. 만약 백제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역사는 백제가 한반도에서 한때는 얼마나 강성했고 얼마나 빛나는 문화를 간직했는지를 기록했을 거야."
소년은 아버지의 말에 귀 기울이더니 생각난 듯,
"개학하면 학교에서 단체로 부여 박물관을 관람한다고 했어요. 그러면 백제의 역사를 더 자세하게 알 수 있을 거예요.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이상하게 떨려요."
하면서 가슴에 손을 대더군
소년의 몸속에는 역시 백제의 피가 흐르고 있는 걸까?
소년은 오래도록 내 근처를 떠나지 않고 뱅뱅 돌면서 즐거워했어. 아버지의 재촉에 자리를 뜨면서도 못내 아쉬운 듯 몇 번이고 뒤돌아 나를 보면서 걸어갔다면 누가 믿을지.
나는 알 수 있었어. 소년은 틀림없이 이곳에 자주 올 거라고.
내가 이 자리에 이렇게 서 있는 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