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푸른 코르시카

by HTG


1. 코르시카에서 결혼식을?

어느 날, 이런 제목의 이메일이 도착했다.

“Are you available to shoot wedding in Corsica in next month?” (다음 달, 코르시카에서 열리는 결혼식을 촬영하실 수 있나요?)


보낸 이는 자신의 딸이 곧 결혼한다며, 유튜브에서 우리가 만든 디트로이트 웨딩 영상을 봤다고 했다.

“놀라워요! 디트로이트 같은 시궁창을 어떻게 그렇게 로맨틱하게 찍을 수 있죠? 난 당신들이 우리 딸의 결혼식을, 마법처럼 담아줄 거라고 확신해요.”

코르시카?

그때 나는 필름스쿨을 막 졸업하고, 웨딩 촬영을 시작한 지 3년 차였다. 뉴욕, 멕시코 등지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코르시카라니. 그건 정말, 심장을 뛰게 하는 뜻밖의 목적지였다.


2. 파리에서 길을 잃다

촬영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 장비 중 일부가 실종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삼각대는 잘못 실려 오를리 공항에 도착했다고 했다. 삼각대 없이 웨딩을 찍는다는 건, 붓 없이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았다.

우린 곧장 버스에 올라, 러시아워로 꽉 막힌 파리 시내를 가로질렀다. 오를리 공항에 도착해서는 손짓 발짓으로 영어가 서툰 직원들과 씨름했고, 결국 장비를 찾았다.

다시 드골 공항으로 돌아왔을 땐— 비행기는 이미 떠난 뒤였다. 우리 앞에 남은 선택은 하나.

다음 비행기에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것.

기적처럼, 마지막 아작시오행 비행기에 우리를 위한 빈자리가 있었다.

우리는 말 그대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디트로이트에서 파리까지 8시간, 파리 시내를 분주히 오가는 버스, 그리고 늦은 밤, 작고 낡은 코르시카 에어 비행기 안.

나는 줄곧 헤드폰을 끼고 얀 티에르센의 『아멜리에』 사운드트랙을 반복해 들었다.

그 음악은 프랑스의 공기였고, 거리였고, 정서 그 자체였다.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을 쓸 때,

영국의 한 작은 펍에 앉아

워크맨으로 비틀즈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하루 종일 반복해서 들었다고 한다.


그걸 흉내 내고 싶었던 건 아니다.

다만 왜 어떤 사람들은 같은 음악을 반복해 듣는지,

그 마음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어떤 음악은 듣는 순간

나를 다른 차원으로 밀어 넣는다.

티에르센의 멜로디를 듣고 있으면,

지금 이곳이 어디든

나는 파리의 한적한 거리를 걷고 있는 기분이 든다.

갓 구운 바게트 냄새가 지나가고,

카페 테라스에선 사람들이 웃고 있다.


그런 감정은 창작에도 분명 도움이 된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같은 음악을 8시간 내내 듣는 일쯤은

별일도 아니다


당시 나는 영상 경력 3년 차의 루키였다. 머나먼 곳에 초청받았다는 사실은 설레었지만,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웠다.

결혼식 촬영엔 두 번이 없다. 순간은 한 번뿐이고, 그 한 번을 반드시 잡아내야 한다. 그 압박은 생각보다 훨씬 더 큰 무게로 나를 짓눌렀다.

그때, 그 무게를 조용히 덜어준 건— 다름 아닌 티에르센의 음악이었다.


3. 첫 만남

다음 날 아침. 호텔 로비에서 이메일을 확인하려 했지만, 컴퓨터는 온통 프랑스어로 덮여 있었고 인터넷은 한 페이지를 여는 데 몇 분씩 걸렸다.

결혼식이 내일인데, 신랑 신부와는 연락 한 번, 얼굴 한 번 마주한 적도 없었다.

느린 인터넷과 프랑스어로 뒤덮인 화면에

짜증이 올라오던


그때—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Excuse me… 혹시 디트로이트에서 온 H?”

돌아보자, 믿기 어려울 만큼 인상적인 여성이 서 있었다.

180cm는 족히 넘어 보이는 키, 질끈 묶은 머리, 머리에 꽂은 선글라스. 화장기 없는 얼굴. 티셔츠에 반바지. 수수한 차림이었지만— 그녀의 존재는 로비 전체의 공기를 바꿔놓았다.

겉모습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에겐 설명하기 어려운, 자연스러우면서도 압도적인 기운이 있었다.

나는 멍하니 서 있었고, 그녀는 웃으며 먼저 말을 건넸다.

“내가 좀 키가 커서 놀랐죠? 전직 모델이에요.”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는 열여섯에 『보그』 커버를 장식한 세계적인 톱모델이었다.

하지만 말투엔 거리낌이 없었고, 눈빛엔 과시가 없었다. 그녀는 화려한 이력과는 다르게— 따뜻했고, 수수했고, 무엇보다 진짜 같았다.

잠시 뒤, 약혼자 세바스찬이 로비로 들어섰다. 작지만 단단한 체형, 서글서글한 눈빛.

내 손을 힘 있게 잡으며 말했다.

“코르시카에 온 걸 환영해요!”


그는 파리에서 클럽을 운영하는 사업가였다.

결혼식은 그의 가족이 소유한 해변에서 열린다고 했다.


“오늘 저녁, 리허설 디너에 꼭 와요. 한잔 하자고.”

그의 말투엔 프랑스 억양과 카리스마가 묻어 있었다.


나는 웃으며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만족한 듯 나를 힘차게 껴안았다.


그 순간,

이 낯선 섬이 조금 덜 낯설게 느껴졌다.



4. 르 빌보크의 밤

리허설 디너는 아작시오 항구 옆, 바닷가에 자리한 레스토랑 **‘르 빌보크’**에서 열렸다.

1988년 문을 연 이곳은 요리사 장 존과 그의 가족이 40년 가까이 지켜온, 아작시오의 살아 있는 풍경 같은 식당이었다.

메뉴는 단 하나. 갓 잡아 올린 지중해 붉은 랍스터가 통째로 올라간 랍스터 스파게티.

양파와 마늘을 올리브유에 볶아 향을 내고, 화이트 와인과 레몬, 토마토를 더한 소스를 면에 천천히 입혔다.

짙은 풍미, 부드러운 산미, 바다의 짠맛과 토마토의 단맛. 그 맛은 이 섬의 정체성을 닮아 있었다.

파티엔 세계 각지에서 날아온 하객들이 모여 있었다. 오바마를 촬영한 사진작가, 유럽 최고의 DJ, 패션 디자이너와 슈퍼모델들.

어깨 너머로 들려오는 대화들은 내가 알지 못하고, 속할 수 없는 세계의 언어 같았다.

나는 월미도 갯벌에서 놀던 촌놈이었다.

이 자리는, 불편했다.

나는 랍스터 스파게티를 한 입 크게 베어 물며,

속으로 조용히 말했다.


쫄지 마.



5. 웨딩데이

결혼식 당일. 하객들은 아작시오 항구에서 요트에 올라탔다. 요트는 커플의 해변 웨딩 장소로 향했다.

한 시간 남짓. 코르시카의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자, 햇빛 속에서 해변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요트는 정박할 수 없어, 작은 보트들이 다가와 하객들을 실었다.

누군가는 바다로 먼저 첨벙 뛰어내렸다. 치맛자락을 걷고, 신발을 벗고, 웃으며, 그들은 바다를 건넜다.

나는 그 장면을 뷰파인더 너머로 바라보았다.

그 순간— 이 마법 같은 감정과 기억을 어떻게든 붙잡아야겠다는 욕망이 가슴에서 불꽃처럼 타 올랐다.


신랑 신부는 해변에서 두 팔 벌려 그들을 맞이했고, 파도보다 먼저, 웃음과 눈물이 해변 위로 쏟아졌다.


잠시 뒤, 하와이에서 날아온 샤먼이 고동 피리를 길게 불었다. 결혼식의 시작이었다.

“결혼은, 살다 보면 저지르게 되는 크고 작은 실수들을 서로 품어주는 일입니다…”

그 말들이 해변의 공기 속으로 흩어졌고, 커플의 첫 키스가 이어졌다. 박수가 터졌고, 하객들의 얼굴은 감정으로 빛났다.


6. 피로연


피로연은 밤새 이어졌다.

프랑스의 결혼식답게, 잔을 채운 건 오직 와인이었다.


DJ는 음악을 틀었고

사람들은 망설임 없이 몸을 흔들었다.

누군가는 웃으며 손을 들었고,

누군가는 눈을 감고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와인과 음악, 지중해의 바람,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밤은 마치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숨 쉬고 있었다.


그러다—

어둠을 가르며

첫 불꽃 하나가 솟아올랐다.


곧이어 연속된 폭죽들.

붉고 푸른 빛들이 밤하늘을 찢었다.

별처럼 흩어진 빛 사이로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환호했다.


나는 그 장면을 담으려 카메라를 들었다.

하지만 곧,

카메라를 내려놓고 와인잔을 들었다.


뭐, 한 장면쯤은

내 거로 남겨두는 것도 괜찮겠지.


7. 돌아오는 비행기


디트로이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

창밖엔 구름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기념품 하나도 사지 않았고,

사진도 한 장 남기지 않았다는 걸.



그런데 이상하게도—

서운하지 않았다.


바람의 냄새,

파도의 질감,

웃음과 눈물,

티에르센의 멜로디,

케리의 첫인상,

세바스찬의 힘찬 악수.


그리고

그날의 공기,

빛,

사랑.




모든 것이,

이미 내 안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게,

내가 가져온 기념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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