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야 Apr 07. 2022

야옹이의 추억

멈춰 선 곳에서 또 다른 이야기는 시작된다.

토독토독 빗소리가 돋는다.

후덥지근하고 꿉꿉한 공기가 내리는 빗줄기에 숨을 고르는 여름 오후, 숙제하다 잠이 들었던 정석은 빗소리 때문인지 얼굴에 닿는 깔끄러운 감촉 때문인지 잠이 깼다. 모로 누운 입가에 고인 침을 닦으며 일어나 앉은 정석의 무릎 위로 새끼 고양이가 올라와 앉는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고양이는 고릉고릉 대며 정석의 다리에 뺨을 비빈다. 빗소리와 고르릉대는 소리만이 적막 속에 가득하다. 정석은 새끼 고양이를 꼭 끌어안는다.


누나들은 도시로 일하러 가고 집엔 부모님과  제대한 형이 있다. 농사일로 한창 바쁠 때라 세 사람은 새벽에 나가 해가 져야 돌아왔다. 정석은 방과 후 윗동네 아랫동네 가리지 않고 친구들을 몰고 다니며 놀다, 빈집으로 돌아올 때면 헛헛한 배만큼 마음도 허기졌다. 하지만 요즘은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골목에서부터 "야옹아!" 하고 부르면 하얀색에 갈색 무늬가 있는 아기 고양이가 "야옹야옹"대며 어딘가에서 톡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정석은 새끼 고양이를 산기슭에서 만났다. 그날도 산을 돌아다니며 오디도 따 먹고, 나무에도 오르며 기운이 쪽 빠지도록 놀다 돌아가는 길이었다. 살이라고는 없는 앙상하고 작은 고양이가 배가 고픈지 정석이를 보고 울어댔다.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기에 집으로 데려와 밥과 물을 줬더니 정석이 다리에 얼굴을 비볐다. 신기했다. 정석은 고양이를 그냥 '야옹이'라고 불렀다. 계절이 바뀌며 야옹이는 점점 덩치가 커졌고 부뚜막을 아지트 삼아 자유롭게 집을 드나들었다. 부모님야옹이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저 쥐나 벌레를 잡아주겠거니 싶어 모른 척할 뿐이었다. 그러나 형은 야옹이가 마루에라도 올라오면 가차 없이 목덜미를 잡아선 냅다 마당으로 던졌다. 그때마다 야옹이는 공중에서 빠득빠득 몸을 틀며 정자세로 착지해 정석이를 안심시켰지만, 형의 우악스러움엔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점점 따가워지는 햇살 아래 풋고추가 단단하게 익어가는 여름이 다시 돌아왔다. 정석은 부모님이 약을 치고 있는 고추밭을 지나 양지마을 김 씨 아저씨네 너른 수박밭을 쳐다보며 입꼬리가 올라간다. 축구공만 한 수박들이 푸른 잎 사이사이 촘촘히 박혀있다. 제법 검은 줄무늬가 선명하다. 정석의 머릿속엔 아직 이르지만 잘 고르면 빨갛게 익은 수박을 맛볼 수 있겠다는 엉큼한 생각이 떠오르고 입에선 흠흠 노래가 새어 나온다.


노을이 깔리는 신작로 길을 걸어 집으로 가는 길, 단합회 겸 정례회가 열리는 날이라 마을 입구부터 고기 삶고, 전 굽는 냄새가 가득하다. 아이들은 쏙 빼고 어른들만 먹고 마시는 날이라 정석은 심통이 났다. 대신, 마을 어른들이 아무도 없으니 과일 서리하기엔 딱 좋은 밤이 기다리고 있다. 환한 달빛에 번득이는 과도를 하나씩 든 네다섯의 사내아이들이 김 씨 아저씨네 수박밭에 모였다. 정석을 필두로 아이들은 수박에 과도를 푹 푹 푹 세 번씩 찔러 넣었다. 그리곤 속을 확인하곤 서로 고개를 다. 이놈이 아니다. 또다시 푹 푹 푹. 이놈도 아니다. 또다시......

"이제 그만하면 되었다. 아버지, 어머니 오실 시간이니 돌아가자. 수박이 다시 잘 붙어야 니까 속이 빠지지 않게 땅 쪽으로 잘 돌려놓았지?" 실망한 아이들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익은 수박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실망하지 마라. 한 달만 더 있다가 오자. 그때는 단물이 줄줄 나는 수박이 입에 척척 들어갈 것이다. 이만 철수!" 정석의 말에 아이들은 배시시 웃으며 마을 앞을 흐르는 작은 실개천으로 달려가 손과 발을 씻었다. 누가 먼저랄 거 없이 서로에게 물을 튕기며 장난을 치고 눈앞에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를 잡으며 먹지 못한 수박의 아쉬움을 달랬다.


다음날 정석이가 학교 가려고 준비하는데 수박밭 김씨네 아주머니가 성난 황소처럼 거친 숨을 내뿜으며 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러고는 대뜸 정석을 향해 삿대질하며 '네가 수박밭을 절단 낸 범인이지!' 하며 벼락처럼 고함을 치신다. 정석은 냅다 가방을 들고 학교로 뛰어갔다. 등 뒤에선 '가만두지 않겠다'는 아주머니의 말이 껌처럼 붙어서 따라왔다. 학교에 오니 수박 서리에 함께 나선 친구들이 모여있었다. '우린 그날 먹은 것도 없이 그대로 놔뒀는데 아주머니 너무 한다'며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는데 학교 운동장에 경찰차가 들어섰다. 정석이와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날, 낮부터 술에 취해서 경찰서로 들어오던 아버지의 모습을 정석은 오래 기억한다. 한해 수박 농사를 다 망쳐 놓았다고 소리치는 김 씨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회초리보다 더 따갑고, 배상해 드리겠다고 머리를 숙이던 아버지의 모습은 초라해서 뜨끈한 눈물이 났다. 그저 수박 장수를 흉내 냈을 뿐 나쁜 뜻은 없었다는 걸 어른들도 알기에 더 이상 그 사건에 대해선 말들이 없었지만, 빠듯한 살림살이를 아는지라 정석인 한동안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을 낮추었다. 집에 오면 얌전히 숙제하고 방과 마루도 닦고 야옹이만 찾아 같이 놀았다. 형도 그런 정석을 모른 척해 주었다. 그러나 마루로 올라서는 고양이에게 야박한 건 한결같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니 정석인 시동 걸린 경운기처럼 슬슬 다시 밖으로 나가 아이들과 어울렸다. 냇가에서 물놀이 한 흙투성이 빨랫감을 쌓아놓고, 입에 달고 사는 엄마의 잔소리에 대거리하며 놀았다. 그렇게 골목길을 내달리다 야옹이를 보곤 했다. 쥐를 잡아먹었는지 입과 코에는 빨간 피를 묻히고  정석이를 보며 알은체하는 야옹이를 만날 때면 가끔 집에서 보이지 않아도 안심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석이가 부르면 달려 나오던 야옹이가 며칠 깜깜무소식이다.

"엄마, 요즘 야옹이가 너무 안 보이네!"

저녁을 먹던 엄마가 흠칫한다. 형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밥을 먹고 있다. "짝 찾아서 집 나갔나 보지." 아버지도 대수롭지 않다. 정석인 정말 그런가 싶어 한숨이 새어 난다. "기다리지 마라." 엄마가 하는 말에 정석인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툇마루로 나와 휘휘 입으로 바람을 불어 본다. 야옹이가 영영 가버렸으면 어쩌지 가슴 한쪽이 뻐근하다. 마당으로 내려와 나무에서 자두를 따먹으며 담장 너머 화단 사이사이 야옹이를 찾는다. 장독대로 된장 뜨러 나온 엄마가 정석의 모습을 보곤 다가와 "고양이 갔어." 한다. 엄마는 뭘 알고 있는 눈치다. 진실을 알고 싶은 정석의 눈이 간절히 빛나자 엄마가 소곤댄다. "형이 마대 포대에 담아서 산에 갖다 버렸다더라. 벌써 며칠 됐어. 안 오는 거 보니......"


그날 이후 정석은 한동안 야옹이를 찾아 동네 산을 헤매고, 마을 구석구석을 뒤지며 다녔다. 형이 무서워 집에 들어오지 못하더라도 동네 어딘가에서 야옹이를 만나게 되길 바랐다. 하지만 야옹이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다시는 못 볼 거란 확신이 들던 날 밤,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췄다. 쉽게 들어가 지지 않았다. 할아버지에 할아버지 때부터 마을을 지키고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 밑동에 걸터앉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형이 이해되지 않았다. 동생이 그토록 이뻐하는 고양이를 어떻게 갖다 버릴 수 있지? 수박밭 사건 때 아무 말 없더니 이렇게 벌주는 거야! 정석은 돌을 주워선 앞 냇가를 향해 던지고 또 던졌다. 툭툭 튀어 오르는 물방울, 번져가는 물결에 눈물이 차오른다. 야옹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골목 어귀 정석이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뛰어나오던 야옹이, 햇살 좋은 마당에서 뒹굴고, 다리에 자기 몸을 비벼오고, 배 위에 올라가 꾹꾹이를 하던 모습, 안아 코를 맞대면 촉촉한 느낌, 말랑한 발의 감촉, 냐옹 꼬리를 바짝 세우고 정석을 부르던 목소리...... 달밤에 피어나는 야옹이의 기억에 정석은 꺼이꺼이 목놓아 울었다.




"악!!! 큰아빠 너무 하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이번에 큰집 가면 막 따질 거야. 아빠 고양이를 그렇게 맘대로 버릴 수 있냐고!"

남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딸이 흥분해서 고함을 쳤다.

"묶어서 갔다는 마대 포대를 설마...... 풀어준 건 맞겠지? 그거 물어봤어?"

아들이 묻는다.

"아니. 안 물어봤는데."

심드렁한 남편의 대답이다.

"진실을 확인하기가 무서워서 못 물어본 거 아냐?"

얼굴을 찡그리며 아들이 다시 묻는다.

"야! 풀어줬겠지. 형이 그렇게 매정한 사람이 아니야. 이야기 끝."

남편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식탁에서 일어선다. 무슨 상상을 하는지 아이들은 아직도 찡그린 얼굴이다. 나는 설거지 거리를 정리하며 아이들을 다독인다.

"그럼... 야옹이는 그날  산에서 마침 하얗고 매력적인 고양이를 만나 둘이 떠난 거야. 야옹이는 벌써 독립하고 싶었는데 맘 약한 정석이가 질척거릴까 봐 참고 있다, 옳다구나! 하고 출발을 한 거지. 그림책 <백만 번 산 고양이>에도 나오잖아. 자기 짝 찾아가는 게 최고로 행복한 거야. 우리 정석이는 엄마 옆자리가 지정석이고."

내 말을 들었는지 아빠가 풋 웃는다.

"나 결정했어. 6학년 여름 방학 최신 아이폰 사준다고 했잖아. 대신 고양이 키우자."

아들의 폭탄 발언에 우리 가족은 깜짝 놀랐다. 어떡하든 스마트폰은 늦게 사주려고 최신 아이폰을 사준다는 미끼를 던지고 6학년 여름 방학까지 기다리게 했는데, 그 꿈의 폰 대신 고양이를 키우게 해달라고 했다. 딸도 신나서 깡충댔다. 우리 부부는 동물을 좋아하는 아들을 알기에 고려해보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어느 날, 우리 집으로 파란 눈에 하얀 고양이 나나가 들어와 가족이 되었다.

야옹이의 이야기가 멈춰 선 곳에서 나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전 04화 나를 만나기 위한 이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