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이 아픈 게 너뿐이겠니?
<자라가 준 구슬>은 『삼국유사』 '원성 대왕' 편에 실려있다. 어린 중 묘정이 배고픈 자라에게 매일 밥풀을 먹이다 구슬을 받았는데 그 구슬은 신묘하여 모두가 묘정을 아끼고 사랑하게 했다. 구슬을 지닌 묘정은 요즘 말로 핵인싸가 되었다. 묘정의 인기는 날로 치솟아 중국 황제 앞에까지 가기에 이르렀는데 알고 보니 그 구슬은 황실에서 잃어버린 물건이었다. 구슬을 되돌려 준 묘정은 다시 별 볼 일 없는 아싸가 되고 만다는 이야기다.
인간은 사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나를 인식하고 가치를 세워가는 존재다. 그러나 사회적 평가에 앞서 먼저 자기를 긍정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예전에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열등감에 빠져 소중한 마음을 놓치고 말았다.
“해야, 소개해 줄 친구가 있는데, 네가 좋다고 며칠 동안 아주 난리다. 좀 만나줘라.”
고등학교 2학년. 어릴 때부터 동네 친구인 K가 우리 반, 내 자리에 찾아와서 하는 말이다. 나는 이 뜬금없는 말이 무슨 말인가 싶어 K를 쳐다봤고, K는 등 뒤에 숨어있는 친구의 손목을 끌어다 내 앞에 세웠다. 유독 하얀 얼굴에 깊은 쌍꺼풀이 있는 키가 작고 귀여운 친구 A였다.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은 없지만 K와 붙어 다니는 친구라 얼굴은 더러 보았다. 그 친구는 정성껏 쓴 편지를 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K의 등을 밀며 자기 반으로 달아났다. A의 편지를 읽고 답장을 쓰는 순간부터 우린 순식간에 책의 중간 페이지를 건너뛴 듯 절친이 되었다. 학창 시절의 나는 자존감이 낮고 자존심만 세서 웬만하면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소심한 학생이었다. 혼나는 게 싫어 선생님 말씀 잘 듣고 학칙을 칼같이 지키는 보수적이고 재미없는 학생. 아이들은 쉽게 드나드는 교문 밖 구멍가게도 못 가는 답답이가 나였다. A가 어떤 점에 호감을 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나에게도 고백하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자라가 준 구슬처럼 으쓱하게 했다.
A와 함께 지내며 알아가는 세상은 내 경험치를 넓혀주었다. 책 읽기가 유일한 취미였던 나에게 A는 당시 유행하던 팝송도 들려주고 연예인 덕후의 삶도 엿보게 해 주었다. A는 뉴키즈온더블록을 좋아해 내 앞에서 <스텝 바이 스텝>을 목청껏 불러대고 그들의 소식을 부지런히 공유했다. 주말이면 우리끼리 영화관도 다녔는데 그때 본 <사랑과 영혼>은 내가 극장에서 친구와 같이 본 최초의 영화였다. A는 쉬는 시간이면 찾아와 애정 담긴 쪽지를 주고, 내 눈엔 너만 보여 같은 오글거리는 말을 잘도 하며 나를 웃겼다. 지치지 않는 에너지로 빈틈없이 내 하루를 채워버리는 친구였다.
활달한 A와 함께 보내는 날들은 새로운 경험으로 가득했다. 다른 친구들은 이렇게도 노는 구나! 새삼 깨닫는 것도 많았고 애써 처음인 티를 내지 않으려 부지런히 A를 쫓았다. 우리는 지금으로 치면 연예인 굿즈를 사기 위해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웃돈을 얹어 초코파이 장사도 했다. 그때는 A의 관심과 사랑에 흠뻑 빠져선 하루하루가 신났다.
학년말, 그런 우리 사이에 제동이 걸렸다. 우리 학교는 기말시험을 치고 나면 전교생 등수를 대자보에 기록해 일주일간 복도 벽에 붙여 놓았다. 성적이 좋지 않은 나는 그 대자보가 길거리 낯 뜨거운 포스터처럼 싫었다. 그래도 안 볼 수는 없어서 벽 앞에서 전체 성적표를 쓱 훑고 있었다. 그런데 상위권에 A가 있었다. 나와 같이 놀기만 했는데 어찌하여 성적까지 좋단 말인가! A의 성적은 중국 황제가 묘정에게 구슬을 빼앗아 가듯 내 마음을 억울함과 질투로 변질시켰다.
마음의 방향이 고개를 틀자 A와 나의 관계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A와 지내는 동안 나는 읽고 싶은 책을 읽는 대신 좋아하지도 않는 연예인 사진이나 찾으러 다녀야 했다. A가 불러대는 팝송을 귀가 아프도록 들어야 했고, 다른 친구들과는 서서히 멀어졌다. 나의 하루가 온통 A의 선택과 취향 속에 놓여 있었다. 나는 정신없이 A를 쫓아다녔고 그 아이에게 인정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거기에 나다움은 없었다. 이렇게 나를 잃어가며 A에게 맞춰주었는데 A는 나를 위해 잃은 것이 하나도 없는 듯했다. 우정이나 사랑에는 손익계산을 하는 게 아니라지만 자꾸만 손해 본 것 같은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쉬는 시간에 A를 기다리는 대신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반이 다른데도 찾아와 함께 다니던 화장실을 더 이상 같이 가지 않았다. 쉬는 시간마다 내 책상 위에 놓고 가는 쪽지에 답장을 쓰지 않았고 그렇게 일방적인 관계 정리에 들어갔다. A도 눈치를 챘는지 찾아오는 빈도수가 줄어들었다. 그렇게 우리 사이엔 점점 벽이 생겼다. A는 K와 함께 다니기 시작했고 자기혐오에 빠진 나는 한동안 혼자의 시간을 견뎠다. 나는 스스로에게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아니, 친구의 재능이 왜 화가 날 일이냐고! 쪽팔리게 왜 질투가 나냐고! 아니면, A가 먼저 나의 세계를 두드렸다는 이유로 이 판의 주인공은 나여야 한다는 오만함이나 우월감이 있었던 걸까? 무엇을 생각하든 못난 꼴값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하던 학창 시절의 나라면 모든 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자라가 준 구슬이 무척 탐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스스로 찾아가는 행복에 더 집중하려 한다. 흔히 타인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수시로 흔들리는 물결일 뿐이다. 자기 자신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성찰하며 아끼는 마음이야말로 나를 성장하게 하는 진짜 거울이다.
묘정은 원래 우물에서 헤엄치고 있는 자라를 관찰해 배고프다는 것을 알아채고 매일 먹을 것을 챙겨주는 세심한 아이였다. 더불어 성실하고 배려심이 깊었다. 굳이 자라가 준 구슬이 아니더라도 자신만의 장점으로 빛이 나서 사랑을 받기에 충분한 성정의 소유자였다. 나 또한 단점만을 부각해 스스로 열등감과 죄책감에 빠졌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런 시간이 나를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든 시간이었음을 깨닫는다. 나는 그런 고약하고 나약한 나를 조금씩 떠나보내며 성장하고 있다.
순수한 우정을 주었던 친구 A에게 내내 미안했다. 늘 행복하게만 보였던 A였지만 내가 모르는 곡진한 사연이 많았고 우리가 헤어진 다음 해에 가족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지금도 친구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고 눈물이 난다. 나에게 준 사랑을 우정으로 키워내지 못한 그 시절의 안타까움은 여전하다. 하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밝고 씩씩했던 친구는 잘살고 있을 거라 믿는다. 가닿지 못할 사과여도 진심을 담아 전한다.
“친구야, 미안했고, 어디에 있든 행복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