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len Mar 03. 2019

100년 전 뉴욕타임스 속 3.1 운동

민박집주인의 뉴욕 이야기(6)

아침저녁 자전거 길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이 프랑스에서 온 여인이란 사실을 불과 몇 년 전에 알았다. 

미국의 상징이 된 푸른 옷의 이 여인은 미국의 독립 100주년을 축하하는 프랑스 국민들의 선물이었다. 1776년 7월 4일이란 미국 독립선언 날짜가 새겨진 선언서가 그녀의 왼 팔에 소중히 들려 있는 까닭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철골 구조물이라는 에펠탑이 1789년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는 것도 얼마 전 라디오를 듣다 알았다. 왕을 단두대에 앉히고 스스로 중세를 끝낸 프랑스의 자부심, 그 자랑스러움이 이제는 프랑스를 상징하는 철탑으로 파리 한 복판에 당당히 서 있는 것이었다.


1919년 3.1절 100주년을 맞아 맨해튼 UN 본부 앞에서 만세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한 달 여 전부터 광고를 하고 참가자들을 모집하고 그 의의를 알리기 위해 신문, 방송, SNS 등이 바삐 움직였다. 미국에 사는 교포로서 그 의미 있는 행사의 그 진행 과정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이 현대 사회에 수 백 명 모이는 행사도 이럴진대 100년 전에 어떻게 그 많은 인파가 함께 했을까? 언론매체도 통신수단도 전무한 가운데 사람들 입과 입으로 수 백만의 장삼이사가 어떻게 그 거대한 만세 물결을 만들어 냈을까? 그 기적 같은 역사의 후손으로서, 정신을 이어받은 후손으로서...나도 나만의 3.1절 100주년 기념을 해 보기로 했다.   


미 의회 도서관에서 찾은 3.1 운동

토마스 제퍼슨 도서관 북쪽 2층 한쪽에 1851년부터 뉴욕타임스 기사 인덱스가 진열되어 있다. 

지난 1월 초 워싱턴 디씨에 있는 토마스 제퍼슨 빌딩을 방문했다. '거버먼트 셧다운'으로 대부분의 공공 기관이 문을 닫았지만 이 곳은 예외였다. 셧다운을 멈추기 위해 가장 번잡하게 움직여야 하는 의회라는 공간이기 때문 아니었을까 싶었다. 의회 도서관 건물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은 전 대통령의 이름을 딴 토마스 제퍼슨 빌딩, "I cannot live without books"라는 말로 유명한 사람이다. 1897년 처음 개관 당시 D.C. 최초로 전기가 들어온 공공건물이란 기록도 갖고 있는 곳이다.


미국의 법률이 만들어지는 의회, 그 광범위한 자료 수집과정에서 여기 있는 수 백만권의 책들이 정책에 관계할 것이다. 그 더미들속에서 뉴욕타임스 인덱스 모음을 찾아냈다. 1851년 최초 발행 이후 지금까지의 기사들의 제목을 묶어 놓은 낡은 서적이 도서관 북쪽 2층 한편을 빼곡히 차지하고 있었다. 현대사 중요 사건들에게 대한 미국의 시각을 기록한 사료로서 가치가 있는 자료였다. 그렇다면 3.1 운동에 대한 기록도 있지 않을까 호기심이 생겼다. 1차 대전 한가운데서 제국주의 세력 중 하나인 일본에 강제 병합된 한반도민 106만 명이 저항에 동참한 그 운동에 대한 미국 언론의 시각이 궁금해졌다. 서가에 꽂힌 수십 권의 단행본 중 1919년 1월-3월 사이 3.1 운동 전후한 시기에 KOREA란 이름으로 검색해 보았다.  


뉴욕타임스 1919년 1월-3월 인덱스 KOREA 부분


KOREA_전 국왕 이희응(고종) 사망. 1월 23일, 13페이지 3번째: E. S. Bisbee의 특별 기고, 윌슨 대통령에게 일본 제국주의의 통제에 반대하여 자치를 요구함. 1월 26일, 7페이지 1번째: 수천 명이 독립시위를 하다 일본에 의해 체포됨. (독립) 선언, 3월 13일, 3면 2번째: 소요가 번져 양쪽 모두 유혈사태가 발생함: 선교사들은 이 소요를 부추기고 고무했다는 일본인들의 주장을 부인했다. 3월 15일, 7페이지 첫째: 대한국민회(1909년 안창호 선생이 주축이 돼 SF에서 설립)가 한국 독립에 관한 평화회담을 시작할 것을 윌슨 대통령에게 묻는다. 3월 17일, 2페이지 첫째: 미국 선교사들은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했는지 말한다: 이 희(고종)는 일본 공주와 후계자 약혼(정략 약혼)을 거부하며 자살했다. 3월 18일, 7페이지 2번째: 미국 선교사들이 독립 소요를 묘사했다: 미국인 여성 두 명이 일본인에 의해 폭행을 당했다, 미 영사가 수감됐다 풀려놨다. 3월 19일, 3페이지 5번째; 판형. 3월 20일, 12페이지 2번째: 미 국무부는 미 영사가 소요사태 중 일본인들에 의해 수감됐던 사실에 대해 파악하려고 노력 중이다. 3월 20일, 3페이지 3번째;  닥터 E.D. Soper 목사는 (조선) 사람들은 자치에 부적합하고 (이번) 소요의 원인은 선동자들에 의해 길러진 자기 결정에 대한 불만들이 폭발한 것임. 3월 20일,...




뉴욕타임스 1919년 1월-3월 인덱스 KOREA 부분





KOREA (이어서)__

12페이지 8번째: Henry Chung(한국 조약 편찬자, 파리 회의 한국 참석자)는 Soper 박사의 자치에 관한 위상에 대답한다. 3월 21일, 12페이지: 6번째; 한국 아들(H. Chung)은 Soper 박사의 우려에 대해 한국 자치가 적합하다고 답한다.; Ir J.A. Crane에 의해, 3월 23일, III 판, 2페이지 6번째; 수그러들지 않는 봉기; 만주인들과 중국 국경을 따라 일어난 폭동: 검사들은 선전 (전단지) 공장을 찾기 위해 서울에 있는 미국인 병원을 수색한다. 3월 26일, 15페이지; 한국 독립 위원회 멤버들은 일본의 압제에 대한 협조와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베이징에 있는 미국 대사를 만났다. 3월 30일, 20페이지 3번째; 한국 군중들은 삼가(Samga) 시청을 불태우고 경찰과 싸운다; 일본은 부정했지만 선교사들에 의해 증언된 잔혹한 일본군들에 대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 시위대들은 전국적으로 커진다, 3월 31일, 3페이지 3번째.










"잔혹한 일본군들" 선교사들이 증언하다.


이상 1919년 1월에서 3월 사이 미국의 시각으로도 한반도의 분위기는 매우 심각했음을 보여준다. 고종의 죽음이 일본 공주와의 강제 약혼 때문이라는 것과 그 이후 한국민들의 시위에 대한 기사들이 엔 큰 연관성은 보이지 않지만 전국적으로 번지는 시위에 대한 기록들이 보인다. 여기에 일본은 한국민들에게 잔인한 폭정을 가하고 있다는 내용이 잇따른다. 시위대에 대한 폭행과 체포 와중에 미국 여성 두 명이 일본인에게 폭행당한 부분도 나온다. 여기에 미국 영사까지 일본군에 의해 체포됐던 사실은 당시 일본이 한반도 내에서 무자비한 진압을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자국민까지 상해를 입는 사태에 대해 미국에서도 심각하게 여겼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미국인 선교사들의 역할이다. 이들이 3.1 운동의 배후 내지 아지트 역할을 해주었던 것으로 일본 정부는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기사 인덱스에서 언급된 바에 의하면 대부분의 미국인 선교사들은 일제의 압제에 저항하는 한국인들의 입장을 이해. 공감을 넘어 적극적인 협조를 해 주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미국 언론에 일본군의 잔학함을 설명해주는 이들도 미국인 선교사들이다. 하지만 Dr. Soper란 목사는 대다수의 선교사들과는 정반대의 입장이었다. 그는 사태 원인과 진행과정을 궁금해하는 미국인들에게 일본 쪽의 입장을 대변한 인터뷰를 한다. 그는 한국인들은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이번 소요는 선동가들에 의해 현혹된 우민들의 우발적 행태라며 폄하한다. 하지만 이 인터뷰에 대해 반박하는 인터뷰가 나오는데 Henry Chung이라는 한국인이다. '한국의 아들'이란 제목처럼 한국의 입장을 영어로 인터뷰한 인물이다. 20C 초반 영어로 뉴욕타임스에 한국인들의 입장을 대변한 인터뷰이가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헨리 정; 정대영이라는 인물


미국 이름 헨리인 그의 본명은 정대영이었다. 그에 대해 조사해 보니 그가 쓴 논문에 간단한 소개가 들어있다. 한국 조약 편찬자, 파리 회의 한국 참석자 

이 간단한 내용으로 추리해 볼 때, 대한제국 당시 통역사로 대외 업무를 맡았던 이가 아닌가 싶었다. 다행히 Prabook이란 사이트에 그에 대한 보다 자세한 소개가 나와 있었다. 

1921년 헨리 정의 저서 The Case of Korea

Henry Chung De Young

헨리 정 대영, 한국인 작가. 1921-1922 워싱턴 군축 제한 회의 참석한 한국 대표단, 한국민족회의, 세계 언론인회의(부회장)

1890년 2월 28일 대한민국 평안군 수전리 출생. 아버지 용포, 어머니 이 시.

1905년 미국에 옴. 1915년 네브래스카 키어니 사범대학 졸업, 1917년 네브래스카 유니버시티에서 예술 학사, 1918-19 노스웨스턴 대학 경제학과 석학, 1921년 워싱턴 디씨 워싱턴대 철학박사.

미 본토, 하와이, 멕시코, 중국,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들에 의해 파리 회의 평화 사절단으로 선출. 그러나 랜싱 장관의 저지로 호놀룰루에서 불발됨. 1920년부터 미국과 유럽으로 파견된 한국 위원. 1921-22년 워싱턴 디씨 무장 제한 회의에 한국대표단으로 참석.

뉴 일한 앤 컴퍼니 부사장

1021-22년 워싱턴주 컬럼비아구에서 한국 대표로 무장 제한 회의 참석

대한인 국민회(1909년 미주 지역의 한인들이 연합하여 결성한 단체) 회원

세계 언론인회의(부사장)

1924년 6월 3일 오클라호마 무스코지에서 Lilie E. Lawson과 결혼


이렇게 이력은 1924년에서 끝나고 그의 이름으로 나온 논문을 다시 찾아보았다. 


The Oriental Policy of the United States (Henry Chung, 1919) 

The Case of Korea: A Collection of Evidence on the Japanese Domination of Korea and the Development of Korean Independence of Movement (Henry Chung, 1921)

Korean Treaties: Comp. by Henry chung (1923)

The Russians came to Korea (Henry Chung, 1947),


한반도에 관한 유일한 영문 서적이 아닐까 싶은 이 논문과 책의 내용은 미국의 극동아시아 정책 결정에 큰 자료가 됐음직하다. 3.1 운동을 우민한 한국인들의 행동으로 폄훼하는 미국인 DR. Soper 목사의 입장에 대해 한국인인 Henry Chung은 어떤 내용의 인터뷰를 했을까. 1905년 미국으로 가게 된 계기며 그가 본 미국은 어떤 나라였는지 미국의 한반도 정책엔 어떠한 기여를 했는지는 우리 후손의 몫으로 남아있다 싶다. 


나만의 3.1 운동 100주년 기념 작업 과정은 소소하지만 의미있었다. 매일 역사의 한 순간을 살아내고 있다 싶은 2019년만큼이나 더 다이나믹했던 1919년의 지식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떤 역할을 부여 받았을까. 어떤 삶을 살아 냈을까. 오늘 만난 낯선 인물, 그 속의 수 많은 들을 보며 아직 정리되지 않은, 평가받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과 역사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역사는 기억하는 자들의 것이라면 이제 우린 더 발굴하고 평가하고 그 의미를 곱씹고 알려야 할 것이다. 지난하지만 소중한 그 과정을 통해 역사의 바퀴는 늦지만 앞으로 나아간다는 소중한 진리를 간직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100년전 그들을 생각하며 오늘을 산다. 




미 의회 도서관,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


작가의 이전글 신디야 미안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