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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영신 Jul 13. 2023

일상에세이#6. 성실한 여학생의 예상치 못한 결말

이 며늘 아는 주입식 교육의 폐해의 산증입니다.

카카오 티브이 '며느라기'는 영화 82년생 김지영과 달리 시리즈 물이라 도저히 시작하지 못하겠다.

짤로뜨는 잠깐잠깐의 장면 만으로도 심박수가 올라가 이미 완치 판정을 받은 

'갑상선 항진증'이 돌아온 기분이다.

성실하고 또 성실하게 살면 해피엔딩의 인생이 올 줄 알았던 '그 착실한 여학생'은 '그 착실한 며느리'가 되어있었다.


여덟 살의 나는 성실했다. 첫 받아쓰기를 교과서를 베끼듯 외워 교과서를 베낀 것 같은 필체로 백점을 받았다. 이미 백점을 맞을 만큼 공부했지만 실수를 줄이기 위해 더 예쁜 필체로 제출하기 위해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열네 살의 나는 성실했다. 초등학생의 중간고사가 없어지는 과도기에 학교를 다닌 탓에 나는 중간고사를 중학교 가서 처음으로 치렀다. 5월 7일부터 중간고사가 시작되어 5월 5일 나는 아침 8시부터 시작해서 점심시간 저녁시간을 제외하고 중간고사 공부를 했다. 그날 목표는 12시간 이상 자리에 잘 앉아서 3시간씩 분배하여 이틀 치의 중간고사 범위를 훑는 것이었다.


열일곱의 나는 성실했다. 뒤늦게 준비한 특목고 준비가 미흡해 진학하지 못한 특목고가 못내 아쉬워 중간고사 전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공부했다. 99.8점의 성적으로 중간고사를 마무리했다.


나의 성적은 나의 가능성이었지만, 성적에 매몰되어 나를 잃은 지 오래였다.

심지어 나의 성실성에 매몰되어 좋은 결과물에 대해서도 잃게 되었다.

(좋은 결과를 받는 것에 대해 내가 노력하지 않았다면 스스로를 인정할 수 없게 되었다. 궁극에는 국내 최고의 대학을 가는 학생보다 더 성실했지만 나의 그 우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나는 그곳을 가지 못했다.)


나의 꿈은 내가 받은 성적에 따라 바뀌었다. 모의고사에서 OOO학교의 인문계열에 합격할 확률이 높아지면 번역가가 되었다가, 사회계열에 합격할 확률이 높아지면 기자가 되고 싶었고, 법대에 갈 확률이 높게 나오면 법조인이 되어있었다.


결국 스무 살 즈음 나는 이미 번아웃 되었다. 책을 보면 글씨가 돌았다.


그래도, 그럼에도 성실했다. 스무 살의 나는 수능 영어 만점이 내 인생의 최고의 기록이었고 외국인을 보면 벌벌 떨었지만 외국어 특기전형으로 온 아이들 사이에서 영미 문학책을 통째로 씹어먹고 결국에는 에이를 맞았다.


그렇지만 성적을 아무리 잘 받아도 내가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모르겠는 건지 하고 싶은 게 없는 건지 모르겠을 때쯤 누구도 아니라고 한 길을 걷고 싶어 졌고 안경 쓰고 반듯한 학생은 갑자기 진지하게 의류학을 공부했다. 


스무 살부터 연애를 한 남자와 그렇게 7년을 연애하고 결혼했고, 말도 안 되는 상황에 계속해서 노출되었지만 언젠가는 이 터널이 끝나리라 나의 특유의 성실함으로 이 단단한 산을 깨부술 수 있으리라 최선을 다하고 또 다했지만 아직도 나는 그 산을 부숴내지 못했고 더 견고해진 바위산에 내가 일조하고 있었음을 느꼈을 때 즈음 나는 약간의 구토감을 느꼈다.


그렇게 내 앞에 놓이는 일과 나를 분리하지 못하는 성실한 여학생은 성실한 며느라기가 되어있었다.

(뜬금없지만 나는 이런 과정을 통해 부모들이 왜 아이들을 좋은 동네에서 키우려는지 좋은 학교를 보내고 싶은지 십 분 이해하게 되었다. 결국 내가 어떤 풀에 속해 있느냐가 나를 더 많이 정의하지 내가 어떻게 노력하고 애쓰는지가 나와 상황을 바꾸기는 힘들다는 것을 깊게 깨달았다.)


갑자기 내 친구가 생각났다.

나와 같은 학교에서 같은 밥을 먹고 같은 땅을 밟으며 지냈지만 

그 친구는 "무지방우유에 캐러멜 듬뿍 넣은 캐러멜 라테 주문하신 분!!!"에 웃었고

"원조즉석떡볶이"라는 말의 모순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친구였는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넌 정말 주입식 교육의 폐해야!"



나는 이제 그 주입식 교육에서 잘 벗어난 산 증인이 되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나는 오늘부터 '며느라기'시리즈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며느리시절인 며느리가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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