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국밥 : 선지국밥
"국밥 한 그릇 주세요."
해진은 구석진 창가자리에 앉아 조용히 말했다.
오후 4시.
점심이라고 하기엔 늦고 저녁이라고 하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하지만 해진은 이 시간을 택했다.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오기 전, 아이들 아빠가 퇴근하기 전 잠시라도 스스로를 위한 밥을 먹고 싶었다.
진한 허기, 아니 말로 하기 어려운 어떤 허기가 밀려왔고 해진은 그걸 참을 수가 없었다.
바쁜 남편을 대신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후
점심시간을 이용해 시 아버님 생신을 챙기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시댁과의 외식은 늘 돼지갈비였다.
시어머님은 역시나 돼지갈비 정식을 주문했다.
점심특선 ‘돼지 왕갈비 정식‘을 주문했다.
3인분을 주문할까 고민하다 , 해진은 늘 그랬듯 2인분만 주문했다.
“저는 아침을 늦게 먹어서 괜찮아요.”라고 답했다.
“아들식구들 없이 밥이 넘어갈라나 몰라!”라고 말씀하신 한마디에 해진은 그냥 밥을 먹지 않기로 했다.
괘념치 않았다.
해진은 시부모님을 싫어하지 않았다.
남편과 정을 떼고 사는 사이도 아니었다.
다만 이 밥상에는 감정이 없었다.
그저 의무만 남은 식탁이었다.
집 앞까지 잘 모셔다 드리고
두부와 버섯 감자 애호박을 담았다. 저녁으로 된장찌개를 끓일 생각이었다.
한창 성장기인 아이들을 위해 단백질로 무얼 챙길까를 고민하며 된장찌개 거리를 담았다.
장을 다 본 후에 브런치 가게에 들러 샌드위치를 먹을 생각이었다.
우물쭈물하는 사이 세시가 넘어갔고 브레이크 타임이라는 안내문과 함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비건레스토랑을 들러봤는데
"키오스크 주문입니다."라는 소리가 건조하게 울렸다.
오늘은 왠지 키오스크로 스스로를 대하고 싶지 않다고 해진은 생각했다.
'나를 위한 밥상은 누구도 쉽게 내어주지 않는구나!' 생각하며 해진이 터벅터벅 돌아서고 있었다.
그때,
작고 낡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국밥집
어린 시절 해진은 국과 김만 있으면 밥을 잘 먹는 아이였다.
그랬어야 했는지 그랬던 건지 모르지만 '국밥'이라는 단어만으로 이미 속이 조금은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말없이 주인장은 국밥을 내어왔다.
그릇 안에는 선지가 떠있었다.
국밥집 앞에 '오늘의 국밥 : 선지국밥'이라고 쓰여있었다.
어릴 적 선지가 가득한 '바께쓰'를 본적 있는 해진은 어쩐지 무서운 생각이 들었었다. 그래서 잘 먹지 못했던 음식이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그 국물이 따뜻해 보였다.
누군가 나를 위해 국을 퍼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왜인지 울컥했다.
반짝이는 숟가락에 국물이 차오르는데 해진은 묘한 마음이 들었다.
그사이 콩나물무침, 김, 무말랭이가 나왔다.
무말랭이가 나왔다......
국물을 한 입 먹고 짠기가 채 가시지 않았지만 해진은 하얀 밥 대신 무말랭이를 입에 먼저 넣었다.
해진은 무말랭이를 좋아했다.
매운맛을 좋아했기도 했지만,
오독오독 씹다 보면 주변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의 다그침도, 나를 향한 시선도,
그 순간엔 잠깐 멀어졌다.
어쩌면 해진이 가진 유일한 방어막이었다.
무말랭이를 오독오독 씹다가 해진은 밥을 국에 말아먹는 대신 국물을 한 스푼 퍼서 밥 위에 천천히 부었다.
빨간 국물이 하얀 밥알 사이로 국물이 스며들었다.
문득 아주 오래전 엄마가 국밥을 부어주던 장면이 떠올랐다. 갓 지은 밥에 뜨끈한 국물을 부어 주었다.
"음식은 뜨거울 때 먹어야 제맛이야!"
엄마는 종종 그렇게 말했다.
해진은 그 말이 이상하게 기억에 남았다.
따뜻한 말인데 늘 바쁜 말투였다.
누군가 국이 뜨거운지, 해진은 배가 고팠는지도 묻거나 기다려 준 기억은 많지 않았다.
그냥, 먹는 시간엔 빨리 먹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해진은 누구를 기다리거나 누군가 나를 기다려주는 밥상이 낯설다.
해진은 천천히 자신의 속도와 적당한 온도의 음식을 기다리며 국밥을 먹기 시작했다.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옆 좌석에 뒤집어 두고 팔을 걷어붙이고 먹기 시작했을 때
뒤에서 누군가 나를 톡톡 건드렸다.
"오랜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