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사이 Rosso/Blu - 에쿠니 가오리/츠지 히토나리
누구나 첫사랑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사람에 따라 달콤할 수도 있고, 쓰디쓸 수도 있다. 아니면 ‘냉정과 열정사이’처럼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느낌이 뒤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냉정과 열정사이’는 에쿠니와 츠지가 서로 한 가지 사연을 가지고 남자의 관점과 여자의 관점으로 각자 쓴 실험적 소설이다. 남자가 떠올리는 첫사랑과 여자가 떠올리는 첫사랑을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방이 될 수 없기에 그녀( 혹은 그)가 받았을 첫사랑의 상처를 제대로 보지 못할 때가 많다.
사랑에 대한 맹점을 이 소설은 잘 잡아 주고 있다. 내가 알지 못했던 그녀(혹은 그)의 이야기. 그리고 헤어지고 나서 그녀(혹은 그)의 삶. 이런 알 수 없는 관음적 느낌과 상대방에 대해서 알고 싶고 궁금해하는 심리가 이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든 게 아닐까 한다.
에쿠니 가오리가 아오이라는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의 입장에서 작성한 이야기다. 여기서 아오이는 밀라노에서 태어난 일본인이다. 소설 속 아오이는 엄청 내성적이다. 관계를 할 때도 밝은 곳은 피하고, 자기의 속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의 자신의 애인인 마빈에게도 마찬가지다. 마빈은 미국인이다. 그리고 밀라노의 아오이가 일하고 있는 가게를 들렀다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하게 된다. 마빈의 성격은 솔직하고, 이해심이 넓으면서 우직하다. 그는 아오이에게 자신과 같이 살지 않겠냐고 먼저 제안을 했고, 아오이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오이의 일상을 보면 단순하다. 아침에 일어나 일하러 갔다가,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집으로 돌아와 목욕을 한다. 그녀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이처럼 단순하다. 자기를 키워줬던 페데리카, 어릴 적 친구인 다니엘라. 그 외에는 따로 만나는 친구가 없었다. 그녀의 단순하고 단조로운 삶이 깨어진 건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 아니 남들 눈에는 너무 사소해서 사건이라 파악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오이에게는 굉장히 큰 사건이었다. 바로 그녀의 유일한 친구인 다니엘라가 임신을 했기 때문이다.
임신. 사실 아오이는 일본 대학을 다니던 4년 동안 남자 친구를 사귀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준셰이. 아오이와 같이 일본 문학을 전공했다. 또한 그 역시 아오이처럼 외국에서 태어나 대학을 일본으로 왔던 거다. 타지 생활에 쓸쓸함이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는지 준셰이와 아오이는 금세 친해졌다. 그렇게 짧은 행복 뒤에 그 둘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헤어지게 된다. 그 이유는 아마 유산 때문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정확하게 짐작하기는 힘들지만.
그때부터 아오이는 잊고 있던 준셰이를 조금씩 생각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일본 대학을 다닐 때 준셰이를 소개하여준 다카시라는 일본 주재원의 아들이 자기를 찾아오면서부터라고 보는 게 더 맞을 듯하다. 그렇게 갑자기 다가온 8년 전의 추억. 그리고 약속. 당시 아오이는 준셰이 보고 자기가 서른이 되는 생일날 피렌체의 두오모에 같이 오르자고 말한다. 그리고 준셰이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어리광 같았던 약속이 떠오르면서 아오이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준셰이는 피렌체에서 명화 복원 작업을 한다. 그는 메미라는 애인이 있다. 그녀는 일본인 엄마와 이탈리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는 곧 어머니를 버리고 떠나버린다. 하지만 아버지의 피는 강했다. 메미는 겉으로는 영락없는 이탈리아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탈리어 어는 한 마디도 하지 못한다. 한 번은 무슨 용기인지 아버지를 보러 가기로 마음먹는다. 준셰이는 메미와 동행해준다. 그렇게 찾아간 밀라노. 준셰이는 그곳에서 언뜻 대학교 첫사랑 아오이를 본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사실 준셰이는 아오이를 잊지 못하고 있다. 처음 소설이 시작할 때부터 메미는 아오이와 비교대상이었다. 활발한 메미에 비해 아오이는 너무나 내성적이었으며 자기의 생각을 꽁꽁 숨겨놓는 아이였다. 한 번은 아오이의 얼굴을 스케치하다 메미한테 들켜 싸운 적도 있다. 사실 준셰이는 한 번도 그녀와의 약속을 잊은 적이 없다. 끄녀가 30살이 되는 생일날 보기로 한 피렌체의 두오모. 그래서일까 준셰이는 피렌체에 살고 있지만 아직 한 번도 두오모에 오른 적이 없다. 왠지 혼자 오르기에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곳은 아오이와의 약속의 장소였으니까.
준셰이는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과거를 미래로 연결해주는 직업인 복원사. 그는 공방에서도 실력자로 통했다. 그렇기에 그는 유명 화가의 작품을 단독으로 복원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더불어 주위 사람들에게 시기심도 받았다. 하지만 준셰이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곧 그의 재능은 불행으로 다가왔다. 누군가 준셰이가 복원 중이던 작품을 찢어버린 거다. 준셰이는 공방의 동료들을 의심했다. 결국 준셰이를 아끼는 공방의 주인인 조안나가 뒤처리를 하기로 했다. 준셰이는 당분간 할아버지가 있는 일본으로 돌아가 머리를 식히기로 했다.
일본에서 준셰이는 근 1년간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그림이라도 그려보라고 말해보지만 그림 역시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때, 대학교 친구인 다카시가 찾아왔다. 그는 아오이를 준셰이에게 소개하여준 당사자다. 다카시는 준셰이와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아오이의 소식을 전하고 떠난다.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준셰이의 마음에 커다란 돌 하나를 던진 셈이었다. 때마침 할아버지 또한 아프셔서 입원을 했다. 할아버지를 병문안하던 도중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그곳에서 아버지가 아오이에게 했던, 준셰이는 모는, 잔인한 행동을 알게 된다.
그렇게 모든 것이 정리가 되지 않고 혼란 그 자체인 그에게 또 다른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조안나가 자살을 했다는 거다. 거기다 소문에 따르면 준셰이의 그림을 찢은 장본인은 다름 아닌 조안나였다는 말도 들렸다. 준셰이는 혼란스럽다. 그리고 날은 어느덧 5월. 준셰이는 조안나의 조문과 동시에 아오이의 약속을 떠올리며 피렌체로 향한다.
'냉정과 열정 사이'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명작이다. 대학교 때 읽고 이번에 두 번째로 읽은 책이지만 그때의 감동만은 두 번을 읽어도 그대로였다. 대학교 때는 Rosso를 먼저 읽었다. 이해가 하나도 되지 않았다. Blu를 읽고 나서야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졌다. 에쿠니의 문체가 전혀 형태로 잡히지 않았고 어려웠다.
이번에는 Blu부터 읽었다. Blu의 느낌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Rosso를 읽었을 때 오히려 조금 더 그녀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공감은 하지 못했다. 왜 마빈을 버렸을까? 왜 그렇게 자기 속으로만 들어가려고 하는 걸까. 그녀의 말은 분명치가 않았다. 오히려 준셰이의 감정을 읽기가 더 쉬웠다. 그는 불꽃이었다. 감정이 불붙으면 그것만을 생각했다. 그에 반해 아오이는 얼음이었다. 겉으로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지만 얼음 밑에는 아주 거친 물결이 흘러가고 있다. 그래서 그 물결의 흐름을 읽어야만이 보다 깊은 감동을 받는 듯했다.
이건 작가의 글솜씨 차이가 아닌 듯하다. 캐릭터의 특성이었다. 만약 누군가 다시 이 책을 읽는다면 Blu부터 읽어보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