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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크seek Apr 23. 2021

집에 초대하려고요, 당신이요.

[낭만 그리스도인 #15]

    [낭만 그리스도인 #15] 집에 초대하려고요, 당신이요.      

  

  “이따 밤에 같이 삼겹살 먹을 사람?”


  적막을 깨는 메시지 하나에 여기저기서 답장이 도착한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각, 열 명이 넘는 동네 대학생들이 불나방처럼 몰려든다. 서너 명 생각했던 소박한 밥상이 갑자기 잔칫상이 된다. 다시 말하지만 곧 자정이 다가오는 후끈한 한여름 밤이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당신이 있기 때문에 나도 함께 하고 싶다’, 계산 없는 청년들의 순전한 마음이다.      


  ‘응답하라’ 시절의 ‘라떼’ 교회 대학(청년)부는 그랬다. 밤을 잊도록 고단한 시험 기간을 보내던, 취업의 막막함을 정면으로 끌어안고 분전하던, 짝사랑의 설렘과 고민 속에 사랑과 우정 사이를 가늠하던 청춘들은 그저 만남의 장이 있는 곳에는 언제든지, 어디든지 달려왔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환대해주는 가장 편안한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선배들은 내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후배들에게 밥 사 주는 데 인색하지 않았고, 그들의 어려움에 귀를 기울이며 고민을 같이 나누곤 했다. 후배들 역시 선배가 솔선하는 일에 팔을 걷어붙이고 함께 땀 흘리곤 했다. 그리고 선배들이 떠난 너무 커 보이는 그 빈자리를, 부담감 속에서도 기쁨과 겸손함으로 섬기곤 했다.       


  그래, 낭만이 있었다. 특히 교회 근처 남학생들의 자취방은 모두 다 사랑방이나 게임방이 되었었고, 여학생들의 자취방은 여성 전용 홈카페나 다름없었다. ‘뭐 먹을 게 없냐’는 한 마디에 남자 선배가 어설프게 만들어준 계란 후라이 올라간 김치볶음밥에도, ‘힘든 일이 있다’는 고민에 여자 선배가 귀담아듣고 마음을 위로하는 대화에도 동생들을 아끼는 진심이 투명하게 빛나곤 했었다.      


  세월이 흘렀고, 삶의 방식이 변했다. 코로나 19까지 더해져 이제는 언택트 시대가 대세가 되었다. 온라인 업무와 모임이 활발해졌고, 사람들은 에너지를 투입해 특정 장소에 모여 일을 처리하는 것에 대해 제법 피로감을 느낀다. 그러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서로 기댈 어깨를 내어주고, 아이 컨택과 공감이 서린 오감의 시간들을, 많은 이들이 그리워하고 있다.       


  독서모임도 마찬가지다. 5인 이상 집합 금지로 인해 온라인으로만 진행되다 보니 “언제 오프라인에서 얼굴 보냐”는 얘기가 매 기수마다 건의사항으로 올라온다. 지방에서도 올라온다는 의욕을 보이기까지 하니 현 시국의 상황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나마 최근에는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지근거리의 2-4인이 모여 반갑게 ‘번개 모임’을 갖곤 하지만 여전히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반가운 마음을 해갈하지는 못하고 있다.

한국인이 모이면 역시 삼겹살. 출처: PIXABAY

  

  그래서 준비 중이다. 아내와 이야기하면서 우리 집을 편하게 오픈하려고 말이다. 무슨 설레는 이벤트가 있어서가 아니다. 딱히 목적도 없다. 굳이 이벤트나 목적을 얘기하자면 바로 ‘선물 같은 당신’이다. 거창하지도 않다. 우리 부부가 먹는 저녁 식탁에 숟가락 몇 개 더 얹는 것이다. 티타임이 그리울 때 온다면 마땅히 당신의 취향을 존중해줄 만한 차 한 잔 내려주는 거다.      


  당신이 방문한다면 우리 부부는 어제보다 조금 더 짙은 떨림으로 오늘 저녁을 기다릴 것이다. 서툴지만 평소 해보지 않던 디저트에 도전해 볼 수도 있다. 어쩌면 둘 다 바빠서 미안한 마음으로 피자나 치킨을 시킬 수도 있다. 아무렴 어떤가. 아주 작고 사소한 일에도 같이 웃고, 떠들며 때론 축하와 위로를 함께 함으로 제법 괜찮은 일상을 하나 더 만든다는 것이. 마음 편히 서로의 삶의 자리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여름밤엔 시원함이, 겨울밤이라면 온기가 더해지지 않겠는가.      


  그 선배들의 따스했던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그때의 나는 철없고, 어리석었음에도 한껏 자신만만한 패기를 앞세워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나의 모난 부분을 스펀지처럼 부드럽게 감싸주며, 그들의 일상으로의 초대를 기꺼이 허락해 준 고마운 마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생긴 건 시크하게 보이지만, 나도 누군가에게 아주 조금은 세상을 살아갈 용기와 기쁨을 건네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한 끼 식사에 당신을 위한 편한 쉼과 애정을 담아 대접하고 싶다.     


  코로나 19가 빨리 종식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집에 초대하게 말이다. 내 일상의 소소한 낭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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