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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크seek May 13. 2021

"우리는 누군가의 주석이다."

'어떤 양형 이유'

    [M_Book #23] '어떤 양형 이유'    


  오래도록 여운이 짙게 남은 책 <어떤 양형 이유>. 올해 읽은 에세이 중 이렇게 미련을 놓지 못한 책이 있었던가. 그래서 또 읽었다. 독서모임 전에는 나눔지 구성안을 마련하기 위해, 멤버들과 나눈 뒤에는 그 의미를 곱씹어보기 위해 한 번 더 페이지를 넘겼다. 새벽이 밀려올 때쯤 메모한 문장들이 더해졌고, 여전히 두근거리며 몰입할 수 있음이 내심 고마웠다. 처음 읽었을 때 내 무감각을 깨운 저자의 필력과 사유의 깊이에 감탄을 연발했었고, 그때의 내 감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재차 확인해서 그랬나 보다.     


  신비롭게도 이 책은 읽는 각도에 따라 고뇌에 찬 판사의 판결문이었다가 한 인간의 내밀한 감정의 자화상이었다가 크리스천 독자에게는 또한 예수의 율법과 시대정신을 고민해 보게 한다. 문제는 활어회의 참맛을 보기 위해선 내공 깊은 주방장의 세밀한 손놀림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나는 칼도 너무 무디고, 무엇보다 오늘 횟집 알바를 처음 시작한 처지인 것만 같다. 도무지 생선을 손질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책의 참맛을 기록해 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보며 음미하고 싶은데, 밑천이 드러난 허릅숭이의 글쓰기로는 도무지 책이 주는 감동(그리고 독서모임 때 나누었던 감정들)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할 것 같다.      


  그리하여 언젠가 다시 <어떤 양형 이유>에 관한 서평을 남겨보도록 하고, 오늘은 멤버들의 서평 일부로 아쉬움을 달래 본다. 다음은 독서모임 멤버들이 기록한 이 책의 소감들이다. 


'하늘이음' 독서모임 2기 도서 <어떤 양형 이유> 줌(ZOOM) 모임.


  "이해와 표현의 수단은 당연히 말과 글이다.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는 한 별문제 없어 보이지만, 제대로 된 이해와 표현은 판사에게나 당사자에게나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완전한 소통은 불가능하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언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불완전하다. 때론 터무니없기까지 하다. ~ 우스개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실제로 의료계에서는 심근경색과 같은 응급환자의 잘못된 통증 표현에 의한 오진 우려 때문에, 환자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통증을 의료진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똑같은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표현을 객관화하고 이를 알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p.263, 265     


  「이처럼 의사와 판사, 검사, 변호사를 같은 선상에 놓고 단순히 비교하는 경우를 흔히 접한다. 특히 우리나라 입시 구조 때문에 이 직업들이 문과 탑, 이과 탑으로 분류되어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들은 이렇게 단순히 비교하기에는 너무나 다른 직종이다. 


  법원에서는 말과 글이 가장 중요한 수단일지 몰라도 병원에서 의사는 환자를 말과 글만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의사들은 흔히 진료는 환자가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환자의 걸음걸이, 얼굴색, 표정, 몸짓, 목소리 하나하나가 문진의 대상이고 이와 더불어 신체 진찰, 화학적 검사나 영상 검사 결과 모두를 통합적으로 읽어야 환자의 적절한 진단과 치료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환자와 말을 나누지 않는 순간에도 의사는 정보를 파악하고, 환자의 말보다 이런 관찰과 검사 결과가 적절한 진단과 치료에 이르는데 더 확실한 정보를 주는 경우도 때로 존재한다.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것은 판사가 양형을 결정하는 것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사진, 반려견, 나아가 생명에까지 판사의 재량으로 값이 매겨지듯 환자에게 진단명과 치료 방법이 의사의 재량으로 붙는 것이 아니다. 의사의 진단과 치료는 환자로부터 얻은 객관적 정보와 “현재까지” 밝혀진 과학적 결과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가이드라인을 따라 행해진다. 그러나 현재까지 모든 질병에 대한 진단과 치료법이 밝혀지고 정립된 것도 아니며, 환자의 개별적 변이나 기저 질환 등의 상태가 다르기에 증상의 발현 정도가 달라 진단이 어려울 수 있고, 같은 질병으로 진단에 이르러 같은 치료를 해도 치료의 효과가 다를 수 있다. 이것은 의사의 주관이나 재량의 영역이 아니다. 어쩌면 신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이렇게나 다를진대 어찌 단순 비교를 한단 말인가. 저자는 판사가 사제이자 신이라고 말하지만, 의사들은 보통 의사는 신이 아니라고 호소하는 것만 봐도 얼마나 다른지 유추해볼 수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기준으로 다른 이들을 보고 함부로 판단하는 것의 문제가 이렇기에 우리는 서로를 존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하고, 모르면 묻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무지외반증, 대동맥박리증은 적어도 의학의 영역에서는 엄연히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하는 진단과 치료의 기준이 있다. 양말을 벗겨보거나 벗겨보지 않는 우연에 맡겨질 일이 아니라, ‘우리하다’는 표현 하나 때문에 오진에 이를 수 있다고 쉽게 말할 일이 아니라 전문의의 진료와 검사 결과를 바탕으로 진단되는 것이기에 그들의 의견을 묻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의학의 영역이 너무도 다른, 말과 글만으로 대변되는 법정의 영역으로 옮겨올 때,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는 표현은 대동맥박리증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되어 의료진의 과실이 인정됐지만, ‘오목가슴이 우리하다는 말은 경상도 사투리라 군산 의사가 다른 질병으로 착각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패소했다고 한다.”와 같은 표현이 나오는 것 같다. 판사들이 양형 이유를 결정할 말과 글이 필요하기에. 수많은 기사의 자극적 헤드라인이 그렇듯, 말과 글의 달인인 판사님의 이러한 표현으로 인해 독자들의 마음에 의사에 대한 편견과 혐오가 자랄지도 모를 일이다. 인생은 고통이라고들 하지만, 차이를 이해하지 못해 자라난 편견과 혐오로 우리는 실제보다 더 큰 고통을 받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저자는 그동안 자신이 판결 내린 사건들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처한 문제나 모습 속에서 사회 구조를 비판하기도 하고, 법 이전에 가장 중요한 가치인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또 그는 자신이 판사로서 흘린 눈물에 대해 ‘슬펐다’라고 표현한다. 

  대관절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아마 상상하는 것 이상일 것이다. 아빠를 걱정하는 아들, 당장 추운 겨울에 길거리로 나앉게 된 늙은 노부부, 남편과 자식을 잃은 아내와 부모들, 사건 너머에 또 다른 그림자를 드리우고 살아가는 그들을 보는 저자의 심정은 어땠을까? 나는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까? 사건을 담당할 때마다 판결을 내리기 전에 고심에 고심을 더했을 그의 마음이 자못 안쓰럽기까지 하다.     


  저자의 양형에는 수만 가지의 이유가 적혀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양형 이유에는 단 두 가지뿐이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 믿지 않는가! 사람마다 각자의 사연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모든 사연을 다 알고 계신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판결문과 양형 이유에는 더 큰 하나님의 슬픔이 담겨 있지는 않을까? 

  그 하나님의 마음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세상 어느 판사가 피고인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겠느냐마는, 하나님이 그런 분이다. 그분에게 있어서는 법의 잣대보다 최고의 가치인 사랑이 더 중요한 것이고, 실제로 나를 위해 그렇게 하신 분이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그 사랑에 감격하며 나에게 내려질 그분의 판결을 기대하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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