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K_Hastings, 좋거나 나쁘거나 조용하거나
브라이튼에 짐을 풀고 이튿날 기차로 도착한 헤이스팅스. 브라이튼과 비슷한 해안 도시지만 브라이튼보다는 매우 조용하다는 이야기를 이미 여러 곳에서 확인한 바였다. 그래도 관광도시니 아주 조용하지는 않겠지? 모름지기 해안 도시라면 바닷가엔 헤엄치는 아이들이 있고, 근처 식당엔 사람들이 맥주와 음식을 시켜 먹으며 깔깔대는 광경이 떠오르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이건 코로나 탓일까, 월요일이었던 탓일까? 사람들은 시장이 열리는 중심부의 카페네로를 제외하고 역부터 해안까지 아주 드문드문. 그나마 관광 도시임을 알려주는 것은 문을 닫은 몇 곳의 상점과 간간히 운행하는 바닷가의 놀이기구뿐이었다. 폐점한 놀이공원을 혼자 돌아다닌다면 이런 기분이려나. 하지만 조용한 것은 또 나름의 운치가 있는 법. 이 동화 같은 도시에선, 북적대는 인파 속에 외로움을 느끼는 것보단 지금의 여유로움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길이 처음 닿은 곳은 역시나 바닷가. 이상하리만큼 짠기가 없는 영국의 바닷가는 가까이 다가가도 부담이 없었다. 소금 바람에 몸이 끈적이는 일도 없어 마음뿐 아니라 몸도 상쾌해지는 기분이다. 모래 대신 깔린 다양한 색의 조약돌을 밟을 때마다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나곤 했는데, 그 성긴 소리에 들뜬 기분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잠시 주저앉아 주변을 둘러보고 파도 소리를 듣는다. 철썩 대며 밀려오는 파도가 큼직한 조약돌 틈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마음이 고요해진다. 드문 인적이었지만 그래도 해안임을 잊지 않게 하듯, 몇몇 사람들은 바다를 보며 상념에 잠기거나 화창한 햇살에 몸을 노릇하게 굽곤 했다. (아래 계속)
모래도 없는 옷을 털고 일어나, 카페와 상점이 줄 선 올드타운 골목으로 향한다. 아쉽게도 닫은 곳이 더 많았지만 어차피 목표는 웨스트 힐로 향하는 리프트. 덜컹대는 리프트가 도착한 웨스트 힐엔 부드러운 스웨터가 깔린 듯 드넓은 잔디와 그 건너로 하늘과 구분하기 힘들 만큼 투명한 토파즈의 바다가 펼쳐진다. 산뜻한 풀 냄새가 살랑이는 이 언덕 위엔 동네 아이들이 모여 노는 작은 놀이터가 있다. 삼삼오오 모여 노는 모습을 한발 떨어져 지켜보면 땅과 바다의 경계가 가려진 탓에, 아이들이 그네를 타고 높이 올라갈 때엔 정말 바다를 넘어 하늘 저 멀리로 훨훨 날아가는 것 같았다.
웨스트 힐에서 내려올 때는 걷는 것을 택했는데, 길을 잘못 든 탓에 원래 보려던 성터엔 가지 못했다. 대신 풀숲이 우거진 주택가와 해안을 따라 늘어선 상점 거리를 천천히 걸었는데, 마치 이 도시엔 다른 색의 햇살이 내리쬐는 듯 동화처럼 채색된 순간이 이어졌다. 다만 동화 같은 건물을 배경으로 두고 등 뒤로 속삭이는 칭챙총 소리를 듣고 나니, 잠시 현실과 배경이 분리되는 멀티버스적 기분이 들었던 것이 함정. 하지만 동화엔 악역도 있는 법이지. 순간 정신이 멍했지만 저 소리로 하루를 망칠 수는 없다. 운 좋게도 이미 나는 웨스트 힐보다 더 보고 싶었던 포토 스폿도 발견했으니까. 더하여 친절한 마트 직원과 카메라를 보고 호탕히 웃어준 과일가게 청년 덕에 마음은 다시 동화 속으로 돌아온다. 해방일지의 대사처럼, 단 몇 초씩 하루 중 좋은 순간의 파편만을 모아 기억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