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K_BRIGHTON, 어떤 얼룩
브라이튼의 햇살이 세탁실 안으로 들어찬다. 여행을 시작한 지 일주일. 하루도 쉬지 않고 도시와 바다와 언덕을 걸었더니 선크림을 발랐음에도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퉁퉁 붓기 시작했다. 해가 강한 탓인지, 하루 한 끼만 먹고 남은 식사는 대충 때운 탓에 몸이 힘든 것인지는 모르지만 하루쯤 여유롭게 보내기로 한다. 숙소 근처 코인 세탁실에서 못했던 빨래를 돌리고, 근처를 쉬엄쉬엄 다니는 것이 나름 계획이라면 계획. 다행히 숙소 바로 앞에는 해변이(한국으로 돌아온 후 알게 된 사실인데 숙소가 있던 쪽 해변은 꽤 유명한 누드비치(?)로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선탠 명소였다.), 걸어서 10분 내외엔 노스레인을 중심으로 하는 관광 거리가 있으니 심심하지는 않겠다.
런던에서 지내는 며칠간 운이 좋게도 매일이 선키스드 데이였는데, 브라이튼에선 더 화창한 날들이 이어졌다. 해안가답게 직설적이고 끈기 있는 볕이 세탁실 안으로 몰아쳐 옷을 세탁하는 동안 쌓인 피로도 함께 살균되는 기분이다. 화창한 세탁방 안에는 나와 바다 볕에 붉게 그을린 백인 아저씨 한 명뿐. 검붉은 피부와 대비되는 하얀 치아를 타고 나온 친절한 목소리가 윙윙대는 세탁기 소리를 뚫는다.
“Hiya. where are you from?”
한국에서 왔다고 답하니 본인의 여동생이 한국에 있는 회사에 꽤 오래 다녔다며 반가움을 표한다. 그 반가움에 나도 질세라 “브라이튼 사람들은 참 친절하네요. 바다 햇살이 생각보다 강하네요.” 따위의 얘기를 이어갔다. 머지않아 내 짧은 영어 실력과 일주일째 적응 안 되는 영국 인토네이션(+브라이튼 아저씨의 더 독특한 말투) 콤보로 웃으며 흐지부지 마무리되긴 했지만.
먼저 세탁이 끝난 아저씨와 굿바이 인사를 하고 멍하니 세탁기가 도는 모습을 들여다본다. 한국에서 지우지 못한 마음이나 기억을 여기서 하얗게 표백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얼룩처럼 남은 어떤 범주의 감정들은 때론 아무리 빨아도 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는 꽤 멀리 떨어진 곳이니까, 그리고 세제도 물도 다를 테니까. 이곳에서 털어버리고 돌아가면 한국까지 다신 못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얼토당토않은 마음이, 비누거품처럼 부풀다 헹굼물과 함께 탈수되어 사라진다. 그래 어쩌면 내가 지우고 싶던 것은 얼룩이 아니라 본디 그러한 색이었으려니.
그렇게 한 시간쯤 건조기까지 돌려 보송해진 빨래를 대충 숙소에 던져두고 슬금슬금 노스레인으로 향한다. 배도 고프고 카페인이 간절하다. 그러고 보니 그간 낮에는 돌아다니느라, 저녁엔 너무 일찍 닫는 가게들 탓에 여유롭게 커피 한잔 마실 기회가 없었구나. 구글맵을 뒤적여 들어간 카페에서 늦은 점심으로 아이스라떼와 베이컨 샌드위치를 시켰다. 베이컨은 미친 듯 짜지만 로스터리 카페라더니 라떼는 맛있어 다행이다. 하나가 안 좋아도 다른 하나는 또 괜찮은 것이 있기 마련(이려나?).
커피를 마시고 보니 한국은 이미 밤이 깊었을 시간이다. 한두 시간 후면 다들 잠이 들 테지. 몸은 한참을 멀리 떨어져 있는데 마음은 한국의 시간대로 움직이는 탓에, 오후 4시 즘엔 잠들었을 한국의 사람들이 떠올라 진짜 혼자가 된 듯 고개가 떨어진다. 미처 건조되지 않은 외로움이 문득 옷처럼 몸 한구석을 감싼다. 서울에서도 늘 혼자였는데 참 이상하지. 우습게도 고작 며칠의 여행에서.
*오늘의 교훈
1.까불다가 수정과 삭제를 혼동하지 말자. 게시물을 표백했다.
2.꼭 메모장에 초고라도 남겨두자. 메모장이 없었다면 멘탈도 표백될 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