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휴고 Oct 30. 2022

밀린 숙제를 꺼내듯

서른일곱, 처음 떠난 여행 

"이제 네 이야기 좀 해봐."

"아... 그러니까 어..."


어떤 자리에서도 한참을 묻고 듣기만 했다. 거기는 어땠어요? 저기는 어때? 뭐가 가장 재미있었어요? 거기서는 어떻게 지냈어? 그러다 가끔 실없는 소리나 던지는 내게 순간 날카롭게 들어온 문장. '내 이야기' 좀 해달라는 말엔 숨이 턱 막혔다. 할 이야기가 없었으니까. 




어떤 말을 해야 즐거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떤 경험이 나를 말할 수 있을까. 늘 마음 한구석에 숙제처럼 남아 있는 질문. 한참 답을 고민해도 찾을 수 없던 대답. 30을 후울쩍(이쯤인가 싶을 때 한 번 더 훌쩍) 넘긴 내가 가진 이야기라고는, 고작 (내가 진 것이 아닌) 빚 청산과 생계유지를 위해 학창 시절을 가득 채운 케케묵은 아르바이트 경험과 남들보다 한참 늦게 시작한 직업이야기. 그나마도 자랑할만한 큰 기업에 다닌다거나, 멋진 결과물을 턱턱 내놓는 능력자와는 거리가 먼 변변치 않은 직장인 중 하나. 영화의 단역도 이보다는 존재감이 크지 않을까?


부족한 능력과 충만한 게으름으로 실패의 연속이란 줄을 잡고 살아가는 나는, 눈앞의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더 큰 세상을 생각할 소견 같은 것은 갖추지 못했다. 다 적을 수 없는 많은 일들로, 여행이나 그 어떤 신나고 즐거운 경험 같은 건 내 삶에 없을 일이라고 여기며 살았다. 어쩌면 나의 이야기를 해달라는 질문들도 꼭 여행에 관한 것은 아니었을 테다. 한데 나는 정말 아무것도 꺼낼만한 매력적인 스토리가 없는 걸. 


그간 나의 여행 경험에 대해 묻는 사람이 왜 없었겠는가? 어학연수가 기본이 된 학교에서, 새로운 것을 보고 채우는 것이 가장 큰 스펙이 된 업계에서, 성실하고 능력 있는 친구들 사이에서. 하지만 그동안은 괜찮았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놓아둔 욕심이었기에, 부끄러울 일도 없이 그냥 "없어요" 솔직하게 말해버리면 그만인 것. 속마음이야 모른다만, 고맙게도 대놓고 그것에 대해 놀라거나 한심하다는 반응을 보여준 사람도 없었으니까.




헌데 기분이 달랐다. 질문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 내 대답이 괴로웠다. 늘 먹던 음식이 어느 순간 입도 대기 싫어지고, 익숙하던 공간의 냄새가 숨 막혀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은 순간이 있는 것처럼, 그 질문에 '없다'라고 말을 꺼내는 모습이 새삼스레 한심스러웠다. 그때 결심했다. 이 지루한 삶에 기억 하나라도 남겨야겠다고. 소심한 성격에 인생을 손바닥 뒤집듯 바꾼다거나 대담한 모험을 즐기지는 못할 테지만, 발걸음은 뗄 수 있겠지. 저 어린 학생들도 아무렇지 않게 떠나는 여행에, 무려 '중대한 결심'까지 필요한 사람이라니 좀 우습기는 하네.

 

늘 그렇듯 고민은 길지만 저지르는 것은 한순간이다. 그저 커피를 타러 일어나다 문득 퇴사를 말한 두 달 전의 그날처럼. 에어컨을 켤까 말까 고민하던 초여름 저녁, 티켓을 어떻게 사는지 조차 몰라 그저 궁금증에 표를 검색하다 나는 런던행 표를 끊었다. 퇴사도 했겠다, 그냥 끊었다. 퇴사 후 혹시 몰라 여권을 만들어두길 잘했지. 다만 영화처럼 쿨함이 넘쳐흐르게 뒤도 안 돌아보고 결제 버튼을 눌렀다면 좋았을 걸, 오를 대로 오른 유류할증료와 표값 덕에 더 저렴한 표를 찾기 위해, 결제 직전 지인에게 SOS를 요청한 것은 너무나 현실적인 모멘트.


표를 끊고 나니 걱정과 두려움의 상승곡선은 유류할증료와 환율보다 더 가파르게 상향한다. 나는 이 숙제를 제대로 다 마칠 수 있을까? 엉망인 기억과 후회만 남지는 않을까.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간다. 머뭇대기만 했던 질문에 짧게라도 대답하기 위해. 방학 끝까지 탁자 아래 밀어둔 채, 열지도 않은 책가방 속 숙제를 문득 정신 차려 시작하듯, 그렇게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조언과 염려 그리고 격려를 고마운 동력 삼아 런던으로 날아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