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휴고 Aug 03. 2022

연착

UK_EDINBURGH, 시작하지 못한 여정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히진 않는데 스멀스멀 불안함이 커진다. 남은 시간 오분. 에든버러 공항의 체크인 데스크에서 알려준 탑승 마감이 코앞이다. 승객의 비행시간 따위 전혀 관심 없는 보안 검색대에서 행여나 비행기를 놓칠까 맘 졸이던 순간을 놀리듯, 보안 검색대를 통과해 들어온 터미널엔 여전히 이탈리아행 라이언에어의 게이트가 공지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찌 알았는지 신기하게도 대부분의 승객은 이미 게이트 앞에 길게 늘어선 후. 나도 체크인 데스크에서 마주친 얼굴들을 따라 그 주변을 서성인다. 그렇게 원래의 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전광판에 나타난 게이트 넘버. 자 이제 슬슬 티켓 검사를 해야 할 텐데 도무지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여기가 맞는지 의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웅성웅성 영어를 비롯한 각국의 목소리로 들려온다. 물론 영어를 빼고는 그랬을 것이다 라는 나의 예상일 뿐이지만.

공지도 없다. 기체 결함이나, 테러 의심 물질이 발견되었다거나 따위의 소리라도 들었다면 덜 답답할 텐데 승무원은 그저 "wait please" 한 마디 후 묵묵부답. 악명 높은 라이언에어의 기행을 읽긴 했지만, 막상 닥쳐보니 가뜩이나 소심하고 이렇다 할 여행 경험도 없는 나는 심장이 쫄릴 수밖에.  


이렇게 비행기가 더 늦어지거나 캔슬된다면 어디서 밤을 지새우고, 결제까지 끝낸 베네치아 숙소에는 어찌 연락을 해야할까? 어느새 머리엔 풀수록 엉켜가는 실뭉치처럼 다양한 악수들이 꼬리를 문다. 차라리 런던이나 파리로 향해야 했나 하는 의미 없는 자책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왜 늘 좋은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십 분, 이십 분, 한 시간... 그렇게 두어 시간이 더 흐른 후에야 명절 고속도로 정체가 풀리듯 해소되는 탑승 라인. 두리번두리번 사람들의 얼굴을 살펴본다. 세상 가장 권태로운 표정을 한 승무원들, 이제 익숙하다는 듯 일단 이륙이나 하길 바라는 대부분의 승객들 그리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나 같은 쪼렙들. 기나긴 불안과 지루함 후엔 각기 다른 입장에도 그 표정만큼은 묘하게 닮아있다. 물론 힘들 때도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는 진정한 일류들도 있었지.


다행히 그 뒤의 일들은 순조로웠다. 마치 어린이날 에버랜드의 T-express를 타는 것처럼 오랜 기다림과 당장 하늘 밖으로 튕겨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덜컹덜컹 스릴 만점 비행을 만끽하긴 했지만 (but 한국으로 올 땐 더 큰 소동이…), 입국 심사는 신속했고 나이스 타이밍으로 여유로운 베네치아행 버스에 탑승했다. 더하여 친절하고 안락했던 숙소까지. 숙소에 짐을 풀어놓으니 겨우 풀리는 긴장에 왜 그토록 걱정했는지 스스로가 우스워진다. 


에든버러 공항. 라이언에어의 승객들.

돌아보면 많은 순간 그랬다. 용기은 엉성했고 걱정은 견고했다. 때로는 열심히 준비해온 일들이, 애타게 갈망했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내 의지나 노력과 상관없는 일들로 가로막히면, 내 잘못이 아닌 순간조차 "내가 조금 더 똑똑한 사람이었다면" 하는 자책을 이어갔다. 풀리지 않는 감정을 얼싸안고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우며 이유도 방향도 모른 채 허둥댔던가.


야속하게도 그런 문제들이 마법사가 등장하는 동화마냥 happily ever after로 단숨에 마무리될 리는 없다. 미성년이 아닌 이상 모든 결과와 책임은 온전한 나의 몫. 어쨌든 나는 구덩이를 메우고 돌길이어도 결국엔 앞으로 앞으로 늦은 걸음을 내디뎠다.


이제 고려 가요 급의 노래가 된 임창정의 'again(박주연 작사)'의 가사를 떠올린다. [온몸에 품어도 바람은 흘러가고 밤새워 지켜도 꽃은 시들겠지만 하늘 아래 네가 있어 오늘도 난 눈부셔] 벌어질 일은 어떻게든 벌어진다. 다만 마음이 건재하면 또 눈부실 것이다. 그러니 불안해도 너무 자책하거나 매몰되지 않기로 한다. 


나도 '나의 모든 수에 후회 따위 없어!'라고 멋지게 말하고 싶다. 하지만 아둔한 내겐 늘 많은 후회가 그림자로 따라붙는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테지. 다만 그런 후회 앞에서도 변함없을 한가지는 무엇이든 다음 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 물론 그 결말에 꼭 좋은 버스 타이밍과 안락한 숙소만이 기다리고 있지 않음을 안다. 하지만 그래야만, 결국 이탈리에 도착한 그날과 한국에서 지난 연착을 추억 삼아 곱씹는 지금처럼, 조금 늦고 또 예상과는 다르더라도 종국엔 무사한 여정을 마칠 수 있을 테니.


친절한 직원들이 상주하는 베네치아의 깨끗하고 안락한 숙소
이전 07화 커필로그 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