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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ugo May 10. 2016

면 위에 선 하나를 긋는다.


아마도 2016년 1월이었을 거다. 

난데없이 화실을 찾았다. 무엇을 그린다는 생각 이전에 나는 내 마음이 쉴 곳이 필요했고 문득 떠오른 것은 텅 빈 공간에 내가 지금, 코 앞에 놓인 사물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다면 대단한 능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인에게 물어 물어 합정 모처에 있는 화실, 그렇게 연필을 잡게 되었다. 


밥그릇, 그것은 처음으로 주어진 임무였으며 3시간을 그려도 밥그릇은 밥그릇으로 보이지 않았다. 초등학교, 아니다, 나는 국민학교라고 불리던 순간에 살았다. 국민학생 미술 대회에서 입상 이력이 있던 나,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감각은 그대로 남았을 것이라 믿었다. 그럴까, 믿고 싶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글만 괴발개발이 아니라 이제는 그림 마저도 같은 상태가 되어버린, 그렇지 않아도 심난했던 나는 다시 시무룩 해졌더랬다. 자책이라면 자책일 것이지만 자책을 오래 끌고 갈 힘 마저 없었던 터였기에 진지할 수 있었다. 오래할 생각이었지만 여유라는 상황은 그리 오래 가질 않았다. 누구나 그런 것인가 보다. 내가 원하는 것은 때론 멀리 있고 내가 원하지 않은 것은 항상 코 앞에 놓여 있거나 그렇게 뭔가가 떠밀려 온다. 


그것은 고독이라는 이름일 수도 있으며, 자립을 위한 행보라고도 해석될 수 있으며, 본질을 위한 선택과 집중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형체 없는 어떤 형질일 것이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사물에 대한 집중이 아니라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를 잡으려는 심정으로 연필을 잡고서 누구도 아닌 '나'를 어딘가에 묶어두고 싶어서였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그림은 어려웠다. 그러니까 내 눈과 나의 손은 다르게 먼 가족처럼 이산가족도 아닌 상봉의 기쁨을 맞이하지 못한 떨리는 가슴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잊었던 내 사람을 떠올리려는 찰나와 같았다. 


허리를 곧추 세우고 동공이 확장된 상태에서 어딘지도 모를 공간에 마음의 점 하나를 찍어두고서 슬슬 스리 쓸 쩍 그려 간다. 비툴 비툴, 세밀히 들여다보면 바스러진 선이 보인다. 하나, 두개. 때로는 선도 아니고 점도 아닌 형태로. 


놀랐다. 숨 하나, 호흡이 흐트러지는 순간 그림은 내가 상상한 것과 전혀 다른 세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다시 호흡부터 가다듬어야 한다는 사실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체득하게 된다. 조용한 화실, 라디오가 흐르는 실내에서 몇 명의 성인이 모인 그 작지만 그리 협소하지 않은 책상이 놓인 곳에서 그들의 호흡과 나의 호흡, 선은 하나가 되고 자연스레 물결처럼 흐른다. 그러다 보면 들리지 않던 미세한 소리는 귓가에 파고든다. 이제야 나의 호흡의 상태가 나의 선과 닮은꼴이었음을 알게 된다. 


아... 그림은 이렇게 그리는 것이구나. 선도 떨리고 착잡했던 내 일상의 어두운 더께가 미세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텅 빈 면 위에 선을 그어 놓아 곧게 서있게 한다는 것은 바닥, 처연하지만 고요한 심연과도 같은 바다. 그곳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연필은 나를 그렇게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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