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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밤 Oct 17. 2023

피렌체1, 힘들었던 취준생의 기억

짧은 밀라노와 늦은 저녁의 피렌체


사람들은 보통 다양한 이유로 밀라노를 찾는다. 나도 밀라노에 온 큰 이유가 있다. 쇼핑이냐고? 아니다. 나는 쇼핑을 하는 것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나는 오늘 아침 그 이유를 위해 굉장히 일찍 일어났다. 바로 ‘최후의 만찬’을 직접 보는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이걸 보기 위해 밀라노 일정을 짰냐고 한다면 아니다. 사실 프랑스 남부에서 피렌체로 넘어가기가 너무 멀어 중간에 잠시 들러야 겠다는 생각으로 넣은 1박 2일 일정이다. 밀라노에 어느 관광지가 있는지도 몰랐다. 여행을 떠나기 2주전쯤 이탈리아 여행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 여행책을 한번 보기 위해 잠시 서점을 찾았다. 그때 밀라노의 볼거리에서 나는 ‘최후의 만찬’ 그림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술에 그리 조예가 깊지는 않다만 미술 교과서에서 보던 그림들을 직접 볼때 느끼는 감동을 좋아한다. 하지만 책에서는 ‘최후의 만찬’을 보기 위해서는 입장권을 3개월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입장권을 구하기 힘들다고 적혀있었다. 그래서 진작 알아보지 않은 스스로를 자책했다. 근데 블로그를 조금 찾아 보았을 때 여행 시기가 가까워 올때 가끔 취소표가 나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서점에서 잠시 책을 덮고 티켓 예매 사이트를 들어갔다.


근데 진짜 왠일인가.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다른 날짜는 모두 회색으로 예약 불가 표시가 되어있었는데 내가 밀라노에 머무는 23일 오전 딱 하나의 티켓이 초록빛으로 예약가능으로 되어있었다. 너무 신기해서 이게 맞나 싶었지만 일단 고민할 틈도 없이 바로 예약을 진행했다. 서점에서 핸드폰으로 어찌어찌 결제까지 완료했고 얼떨결에 23일 밀라노 방문일정에 ‘최후의 만찬’을 볼 수 있게되었다. 살다보면 이런 소소한 기적의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다. 9시 15분에 입장을 하는 티켓이고 30분전에 티켓 오피스에 가서 현물 티켓으로 교환해야한다. 30분전에 도착하지 않으면 티켓에 대한 권리가 없어진다고 무섭게 적혀있었기에 이른 아침 6시 부터 눈이 떠졌다. 다시 잠들면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 씻고 뒤척이기를 반복하다가 짐을 정리해서 조금 이른 시간에 나왔다. 최후의 만찬을 보고나서 밀라노 시내관광을 바로 해야했기에 나오면서 체크아웃을 해두고 짐을 호텔에 맡겼다. 살짝 쌀쌀한 날씨 같았지만 또 금새 따뜻해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반팔에 청바지를 입고 홀홀이 나섰다. 밀라노 중앙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5정거장만 가면 된다.


밀라노 지하철은 참 간편하다. 따로 티켓을 살필요없이 신용카드로 결제가 가능하다. 마치 매일 출근길에 타는 지하철인양 자연스럽게 카드를 태그하고 타야할 방향을 찾아 내려갔다. 이탈리아는 처음이지만 이제 유럽의 지하철이 낯설지 않다. 어제 저녁에 마주한 중앙역 근처의 밀라노는 꽤나 평범한 현대식 도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중심 시내로 들어오니 확실히 전통적인 양식이 눈에 띄는 아름다운 건물이 드러났다. 역에서 빠져나와 10분정도를 걸어 ‘최후의 만찬’ 벽화가 그려져있는 성당으로 향했다. 날씨가 꽤나 쌀쌀했다. 그래도 아침시간이 지나면 괜찮겠지? 하는 생각으로 연신 추운 팔을 감싸 안았다. 


티켓 오피스는 이미 열려있었다. 직원에게 예약 내역을 보여주니 내 이름을 확인하고 티켓을 바꿔주었다. 30분이나 일찍 왔기 때문에 밖에서 입장순서를 기다려야한다. 걱정했던 날씨가 문제다. 니스에서의 따뜻한 날씨에 적응했던 탓에 이런 쌀쌀한 날씨를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온기가 있는 손으로 시린 팔을 감싸 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그림을 보고 나서 시내에서 옷을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다가오니 사람들 무리가 입구 앞으로 모여들었다. 저긴가보다라고 생각해서 차례로 입장하는 사람들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티켓과 가방 검사를 하고 조금의 설명을 듣고나서 바로 벽화가 그려진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한쪽 벽면에 책으로만 보던 최후의 만찬의 웅장한 벽화가 그려져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지워지고 있다는데 그 지워짐의 흔적이 조금씩 느껴졌다. 이렇게 멋진 그림을 미술관이 아닌 성당안에서 만나게 되니 그 감회가 새로웠다. 그림을 보고 오기전 각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조금은 가까이 다가가 인물들에 집중해서 보고 나중엔 뒤로 나와 전체적인 그림의 느낌을 감상했다. 단 15분만 허락된 미켈란젤로의 조우였다. 짧았지만 강렬했다. 이 그림과의 마지막 만남이 될 수도 있기에 그 공간에 온전히 집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15분이 지나니 칼같이 방문객을 내보냈다.



최후의 만찬을 보고 계획했던 시내 관광을 하기로 했다. 날씨가 너무 추웠던 탓에 목이 살짝 간지럽기 시작했다. 감기가 오면 안된다는 생각에 일단 중심가에 가서 자켓을 하나 사기로 했다. 두오모 성당 바로 근처에 위치한 H&M에 들어가니 40유로 정도에 괜찮은 베이지 골덴 자켓이 있었다. 이건 한국에서도 입기 좋겠다는 생각에 고민하지 않고 결제했다. 새로 산 베이지 자켓을 걸치고 밀라노 시내를 돌았다. 두오모 성당과 성당 루프탑 그리고 밀라노의 쇼핑 거리를 돌았다. 밀라노 패션 위크와 겹치는 시즌이라 그런지 광장부터 거리까지 온통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니스의 한적함과 상반되는 북적거림에 아직 적응되지 않은 기분이었다. 중심가를 빠져나와 외곽의 성쪽으로 걸었다.



밀라노 성쪽으로 걸어가니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성을 통과해서 뒷쪽의 한적한 공원을 걸었다. 간만에 온전히 혼자 보내는 시간이었기에 딱히 뭔가를 봐야겠다. 어딜가야겠다는 생각없이 밀라노의 공기를 느끼며 걸었다. 그렇게 생각 디톡스를 하며 걷고 있는데 얼굴 위로 두터운 빗방울이 떨어졌다.  비 예보가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조금 떨어지고 말 비라고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지하철역과는 한참 떨어진 공원의 한복판을 걷고 있던 중 몇방울의 빗방울은 이내 폭우가 되어 쏟아지기 시작했다. 공원 한복판 우산도 없고 몸을 숨길 건물 하나 없던 차 나는 정말 오랜만에 나무 밑으로 몸을 숨겼다. 비를 막아 주기에 충분히 넓고 큰 나무가 있었기에 다행이다. 나무 밑으로 들어가 쏟아지는 비를 바라봤다. 이따금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조금의 빗방울은 오히려 시원했다. 나무 아래로 비를 피한건 나뿐만이아니다. 대각선 건너편 나무아래엔 한 커플이 비를 피하고 있다. 비가 온다고 해서 그리 추워진 것도 아닌데 역시 하나인듯 껴안고 있다. 내 얼굴에 빗물이 떨어졌나 뭔가 흐르는 듯 하다.



비가 조금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비가 온전히 그치길 기다리기엔 종일 한끼도 먹지 않은 배가 참아줄 것 같지 않았다. 적당히 내리는 비를 맞으며 밀라노의 공원을 빠져나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지하철을 타고 다시 중앙역 근처로 돌아왔다. 다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기에 뛰어난 맛집을 찾아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숙소 근처 적당히 평점이 좋은 파스타집을 찾아 들어갔다. 비에 젖은 관광객을 살짝 경계하는 듯한 인도인 서버가 자리를 안내해주었다. 자리에 안자 실패가 없을 법한 해산물 스파게티 한접시와 화이트 와인 한잔을 주문했다. 역시 선택은 성공적이었다. 뛰어난 맛집에 가지 않더라도 본고장의 식당을 기본적으로 맛있다. 토마토 베이스의 해산물 파스타를 먹게 되면 보통은 해산물의 향이 강하지 않아서 토마토 파스타가 되어버리기 일쑤이다. 하지만 역시 본고장은 다르다. 전체적으로 각종 해산물의 풍미가 밸런스있게 느껴지면서 토마토의 맛이 부드럽게 뒷받침해준다. 디저트까지 먹을 생각은 없었으나 식사가 만족스럽기도 했고 디저트를 물어보는 이 인도인 서버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얼떨결에 티라미수도 하나 주문해 말끔히 해치웠다. 이렇게 맛있는 식사를 끝마치고 짐을 맡겨둔 숙소에 들러 짐을 찾아 다시 밀라노 중앙역으로 향했다. 밀라노의 중앙역은 보면 볼수록 웅장하고 멋지다. 밀라노에서의 짧은 시간을 뒤로하고 이번 여행 가장 기대한 장소 피렌체로 간다.



티켓에 적힌 플랫폼을 찾아 피렌체행 기차에 올랐다. 근데 뭔가 기차의 상태가 이상하게도 좋다. 일반 기차와는 달리 좌석이 넓고 기차칸의 화장실로 넓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티켓을 확인하니 비즈니스 석이다.기차 티켓을 시간만 보고 급하게 예약하다보니 조금 비싼 비즈니스 좌석을 예약한 것이다. 이런 생각지도 못한 사치를 누리다니 하며 헛헛이 웃었다. 기차를 좀 타고 가다보니 중간에 음료와 간식까지 준다. 재미있는 경험이다.


피렌체는 이번 여행 가장 기대하고 있는 도시이다. 바로 여행을 떠나기전에 봤던 ‘냉정과 열정사이’라는 영화 때문일지 모른다. 영화 속에 비춰진 조용하고 아기자기한 골목 골목들 그리고 두오모 쿠폴라 위에서 바라본 적색의 도시, 그 장면들이 내게 큰 기대감을 줬다. 물론 나는 영화속 주인공처럼 두오모 쿠폴라에서 만나기로한 누군가가 있는 것은 아니여도 말이다. 여길 올 줄 알았으면 10년전쯤 아무랑 피렌체에서 만나자고 약속이라도 해둘걸 그랬다. 밀라노에서 두시간여를 달려 기차는 곧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역에 도착했다.


저녁 8시쯤 피렌체에 도착했다. 산타마리아 노벨라역은 밀라노 처럼 웅장하진 않아도 소박했다. 저녁을 혼자 먹기 아쉬워 내일 피사 동행을 함께하기로 한 지희씨한테 미리 연락을 해보았다. 그러니 저녁을 가볍게 파니니로 먹을 생각이라하여 같이 먹겠냐고 물었고 나는 좋다고 했다. 나는 잡아 둔 게스트하우스에 들러 빠르게 짐을 풀고 지희씨를 만나러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에 도착하니 한 한국인 여자가 보였고 광장에서 하고 있는 버스킹에 푹 빠져있었다. 그래서 말을 걸어보니 만나기로 한 지희씨가 맞았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했다. 피렌체 시작부터 피사 동행까지 함께 할 26살 지희라는 친구다. 일단 하루먼저 피렌체에 도착했다는 이유로 지희는 나를 안내해서 피렌체 중심가로 향했다. 본인이 미리 알아본 파니니 맛집이 있으니 거기로 가자고 했다. 아무 정보도 없었던 나에게는 고마운 이야기였다.


피렌체의 밤거리는 밝고 활기찼다. 사실 내가 생각한 피렌체의 이미지와는 조금 상반되는 분위기였다. 영화를 보고 사진을 보았을 때 나는 조금 조용하고 소박한 도시의 이미지를 상상했다. 하지만 피렌체는 활발하고 젊었다. 수만명의 관광객을 위한 식당과 술집들이 거리를 온통 활기차게 메꾸고 있었다. 우리는 시뇨리아 광장을 가로질러서 파니니 가게로 향했다. 파니니 가게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사람들이 줄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식당에 믿음이 생기기도 하지 않은가. 우리도 10분정도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각자 원하는 파니니를 하나씩 사서 다시 시뇨리아 광장으로 향했다. 날씨가 마침 선선하고 좋았기 때문에 밖에서 맥주 한잔과 함께 음식을 먹기 좋았다. 우리도 광장 한켠 계단에 자리를 잡고 파니니를 먹기 시작했다. 파니니는 맛있었지만 빵이 굉장히 딱딱했다. 내가 한국에서 먹었던 그 부드럽게 구워져 나오는 느낌이 아니었다. 빵을 몇번 뜯어먹고 나니 입천장이 온통 까졌다. 둘다 서로 입천장 안부를 묻기 시작했고 파니니를 먹을 때 피맛도 같이 난다며 웃었다.


지희는 아직 취업 준비생이라고 한다. 취준생인 지희는 되려 직장인이면서 휴가를 내고 온 나를 부러워했다. 그래서 나는 무슨 소리냐며 취준생때가 더 자유롭고 좋지 않냐며 반문했다. 하지만 지희는 자유롭지만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이 불안한 시기를 범수씨도 겪어보지 않았냐 말했다. 그 말에 침묵으로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나도 살면서 제일 자존감이 떨어졌던 순간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취업준비생 기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돌이켜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어린 나이의 취준생인데 그때는 어쩜 그게 그렇게 힘들었는지 모르겠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소속감이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졸업유예 상태로 신분은 대학생이지만 수업을 듣고 있지 않았기에 결국 대학생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취업을 한 상태도 아니었기때문에 직장인이라는 타이틀을 달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창업을 하겠는가 무엇을 하겠는가 그저 취업준비생일 뿐인것이다. 


그리고 나의 진로를 직장인으로 정한 이상 이 애매한 시기에 나의 운명은 내 손에 달려있지 않았다. 회사들에게 나의 운명이 모두 달려있다. 그래서 그 시기의 나는 좀 더 무기력했었다. 지금 뭔가를 더 열심히 한다고 해서 당장 이력서에 적어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때까지 내가 해온 것들을 정리해서 전달하고 그들 앞에서 말하고 나를 선택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수동적이어질 수 밖에 없는 기간이기에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살면서 나는 잠에 드는 것으로는 고민해본적이없다. 아무리 불편한 잠자리어도 머리만 대면 잠에 들었다. 하지만 이 취업준비생 시기에 처음으로 불면증에 시달렸다. 불안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던 날들이 많았다. 그런 생각을 돌이켜 보니 지희의 상황이 이해가 됐다. 그땐 아무리 힘들어도 취업만 시켜준다면 감사히 일할 준비가 되어있는데 말이다. 


그래도 나는 지희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나라면 불안감으로 되려 아무것도 못하고 이 시간을 그저 그들의 선택을 가만히 기다리며 소진하고 있었을 텐데, 불안감 속에서 얻을수 있는 자유를 여행이라는 경험으로 치환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다. 사람들은 모두 매순간 간절한 것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간절한 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 다고 해서 나의 모든 시간과 정신을 불안함에만 쏟지 않았으면 한다. 뜻대로 되지 않음에 따라 생겨나는 시간과 자유로 이렇게 또 다른 경험을 얻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만난지 한시간도 안된 우리지만 취업준비 기간에 대한 깊은 공감대를 나눴다. 저녁 8시 피렌체 광장이 주는 힘인 것 같다. 파니니를 반쯤 먹고 남은 파니니는 내일 오전 피사로 떠나는 길 아침으로 먹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는 젤라또 집으로 가고 젤라또를 하나씩 샀다. 그리고 천천히 숙소 방향으로 걸었다. 걷는 중 한 골목에서 펼쳐지는 첼로 버스킹에 눈과 귀를 뺏겼다. 첼로 연주자는 영화 스타이즈본의 주제가를 연주했다. 별계획 없었던 피렌체의 늦은 첫날이지만 생각보다 의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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