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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허실 Jul 21. 2020

애제자의 편지

내 마음을 건드리는 글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다. 어렸을 때부터 기억력이 좋지 않은 것이 은근히 콤플렉스였다. 사람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하고 한 번 읽었던 책 내용도 하루가 지나면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시험을 보기 위해 책 내용을 달달 외우는 것은 나름 잘했지만 시험이 끝나면 공부했던 내용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성인이 되고 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어렸을 때는 나만 그런 줄 알고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누가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큰 고민이었다. 그래서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아주 사소한 것까지 기록하고 기록했을 때의 느낌도 기억하기 위해 가능한 원본 그대로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나의 추억이 담긴 보물 상자 안에는 어렸을 때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와 나의 다이어리, 야자 시간에 첫사랑과 주고받은 작은 쪽지들, 군대에서 쓴 일기장, 스승의 날 때 선물로 받은 감사 편지들이 가득 쌓여있다. 가끔은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오래된 기록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과거의 내가 그곳에 있어서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얼마 전 보물상자를 열고 이런저런 기록들을 보다가 재미있는 쪽지를 발견했다. 아마 내가 교사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몇몇 학생이 내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다가 쪽지를 쓴 것 같았다. 그 당시에 재치 있는 표현이 인상적이어서 보관해두었는데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편지를 읽다가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무의식의 흐름으로 쓴 애제자의 편지를 보며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재치 있고 따뜻한 글이다. 오늘은 딸기 셰이크를 먹어야겠다.



애제자의 편지


잘생긴 허실. 

아침부터 정말 고생하시네요. 

제 뒤에는 방금 H가 지나갔어요. 


지금 허실 자리는 너무 충격적이에요.

어떻게 어제 먹은 딸기 셰이크 컵이 아직도 있는 거죠? 

그래서 그런지 허실 자리에는 딸기 셰이크 냄새가 정말 가득하네요. 

딸기향이 나는 허실 자리라니 참 새로워요.


허실 자리를 언제 마음먹고 치워드리고 싶을 만큼 지금 허실 자리는 굉장히 더럽네요.

물론 제방도 오지게 더럽긴 해요. 

하지만 저는 어제 방을 치웠기 때문에 허실에게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래도 전 허실이 좋아요. 허실의 글씨체가 좋아요.

그리고 허실이 쓰는 이 키보드 되게 마음에 들어요.

내년 제 생일 선물은 이걸로 부탁해요.

허실은 아마 꼭 사주실 거라 믿어요.

허실은 저를 아끼니까요. 허실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왜냐구요? 좋은 사람이니까요. 


절대 제가 심심해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에요.

정말 허실이 보고 싶고 허실이 좋아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점심시간에는 꼭 

허실의 딸기 셰이크 컵을 꼭 씻길 바래요. 

책상 위에 고이고이 접은 신한카드 봉지도 버려야 해요. 

그리고  옆에 있는 노란색 테이프도 꼭 버리세요. 


마지막으로 티프린스에서 온 

두장의 간이 영수증은 잘 챙기셔야 해요.


허실의 애제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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