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길

나는 두렵지 않았다.

by 후이빈

사촌언니와 나는 강원도 울진에 사는 큰언니집을 향해 북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북쪽 인민군이 침략해 다들 남으로 남으로 피난 가는데 언니하나 믿고 북쪽으로 도망가는 게 지금 생각해도 이치에 맞지 않지만 그때는 언니가 있는 그 집이 우리에게 안전한 피신처가 될 거라는 생각만 가득했다. 하루에 100리씩 쉬지 않고 열 홀을 걷고 또 걸었다. 가는 길에 수레에 돈보따리를 싣고 도망가는 피난민, 소를 끌고 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북쪽으로 가는 우리를 염려와 의문의 눈길로 바라보곤 했다. 신기한 것은 그 나이에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는 사촌 언니에게 돈이 있어야 사람대접을 받으니 우리 돈은 쓰지 말고 대신 가능하면 얻어먹자며 언니를 설득했다는 것이다. 숫기없이 창피해하는 언니에게

“언니는 가만있어. 내가 다 얻어올게.”

라며 굴뚝에 연기만 났다 하면 어느 집이든 찾아들아가서 저녁 한 끼만 먹여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래도 누구 하나 우리를 내치지 않고 동그란 상에 된장찌개, 김치, 밥을 그릇에 넘치도록 가득 담아 대접해 주었다. 떠날 때는 가을 옥수수며 대추를 싸주는 강원도 주민들의 인심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처음엔 창피해서 말 한마디 못하던 언니도 음식을 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입속으로 한가득 퍼먹기에 바빴다.

또 어느 동네에서는 제사음식으로 적당하게 익은 빨간 대추나무 밭이 보이길래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대추 따서 먹고 가자.”

언니는 깜짝 놀라며

“뭐? 야 주인한테 들키면 어째?”

라며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떴다.

“피난통에 뭘 뭐라고 하겠어. 내가 올라가서 나무를 흔들 테니까 언니가 얼른 주어서 자루에 넣어.”

의기양양 기다란 막대기를 구해 혼자 나무로 올라가서 있는 힘껏 나무를 흔들어대니 대추가 기다렸다는 듯 우수수 떨어졌다. 저쪽에서 할아버지가 소를 끌며 오는 게 보였지만 먹을 게 궁했던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대추를 주워 담은 다음 사람키만큼 자란 조 뒤에 숨어 할아버지가 지나가길 숨죽여 기다렸다. 할아버지는 우리를 못 보고 지나가셨고 무사히 한 자루 그득하게 대추를 서리했다. 잘 익은 빨간 대추를 양껏 집어먹으며 걸어가는 그 기분이란!


밤중에 굳이 대관령고개를 넘어가야 한다는 게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 가족을 따라 길을 나섰고 산이 얼마나 높은지 산봉우리에 오르니 마치 하늘과 닿는 기분이었다. 훤한 달빛아래 희한한 기분을 맛보고 있는 어디선가 멀리서 빨래 다다미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을 재빨리 둘러봤지만 어디에도 사람이 사는 흔적은 보이지 않음을 알아차리자 기분이 으스스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무서워진 우리는 대관령이 열 개라도 오늘 이곳을 얼른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힘들어도 발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산을 넘고 날이 밝은 이후로도 하루종일을 걸어서야 우리는 울진에 도착했다. 그렇지만 어디가 어딘지 전혀 알 수가 없어 길 가는 사람에게 물어물어 겨우 언니네 집엘 찾아갔는데 이미 인민군이 가득 차 있었다. 순간 겁을 잔뜩 먹은 채로 한 군인에게 집식구들이 어딨는지 물으니, 귀찮다는 듯 저 안에 할아버지한테 물어보라고 했다. 언니는 오래전에 시집을 가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언니 시댁에 대한 단서는 하나뿐이었다. 언니가 가끔 집에 놀러 오면 엄마아빠에게 시댁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바빴는데 그중에서도 언니는 시아버지가 싫었는지 시아버지는 별명이 멍청이영감이라며 놀려대곤 했다. 그래서 나는 언니 시아버지가 머리가 모자란 바보멍청이라 언니가 싫어하는구나 생각했었다. 인민군이 가리키는 할아버지에게 나는 대뜸 다가가 물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멍청이 할아버지예요?”

이상한 질문을 하는 여자애를 보신 할아버지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당신 누구요?”

라며 나를 흘겨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되물으셨다. 할아버지가 재빠르게 대답하는 모양이 전혀 멍청이가 아니고 지극히 정상인 것만 같아 나는 금방 얼굴이 빨개지면서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 저는.. 음.. 서울에서 언니 찾으러 왔는데요.”

모기만 한 목소리로 땅바닥을 쳐다보며 중얼대자 잠시 나를 째려보시고는

“너네 언니 윗마을에 아들집에 가있으니 거기 가서 알아봐!”

라며 차갑게 대꾸하시고는 바로 등을 돌려버리셨다. 어찌나 창피했는지 그 길로 달려 나가 나는 언니를 찾아갔다. 그리고 다시는 그 할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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