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운동강사라는 직업을 평생 동안 한 번도 꿈꾸어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미국땅에서는 언감생심. 학창시절, 체육시간 아껴서 공부하고 그걸로 좋은 점수를 받는 게 더 잘하는 거라고 그렇게 가스라이팅(?)하는 환경에서 살아온 내가 운동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은 지극히 편협하기 짝이 없었다. 20-30대를 거쳐 오면서 체력이 달려서 뭘 못 한다는 건 곧 정신력이 딸리는 거라고 치기 어린 막말을 쏟아내던 젊은 시절엔 운동강사라는 직업은 체육을 전공한 사람들이 하는 특수업종이었다. 운동은 누구나 살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이며 근육이 곧 나의 자산이라는 근테크개념 따위는 개나 줘버려도 될 법한 것이었으니까. 사십에 다돼서 잔혹한 임신출산기를 접하고 나서야 비로소 한겨울 얼음 같은 단단한 나의 고정관념이 한 꺼풀 벗겨지기 시작했다. 내 체력에 대한 자존감은 이미 부서졌고 나는 겸손해졌다. 건강은 자랑하는 게 아니라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다. 그런 나에게 필라테스가 가져다준 심신의 안정감과 생기, 나아가 나의 하루의 질을 높여주는 생생한 경험은 가르치는 선생님을 보는 시선자체를 바꾸는 변화를 가져왔다. 이 좋은 느낌을 알고 이미 나보다 한참 앞서 필라테스를 마스터하고 가르치는 강사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만족감과 행복감을 가지고 사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강사가 되면 세상이 반짝반짝 무지개색으로 보이게 되는 거 아닐까?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인간의 환상은 끝이 없어서 수업을 들을 때마다 바라보는 강사는 이미 나에게 천상계의 인물 그것이었다. 물론 지금 강사가 되어 지내는 현실은 무지개도 천상도 아닌 또 다른 세상을 보여주지만 어쨌든 그 당시에는 모든 선생님들이 부러웠다.
동작이 조금씩 익숙해지고 이제는 옆을 보며 따라 하지 않아도 되기 시작할 때 스튜디오의 다양한 강사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특히 나랑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고 아이가 어린 엄마를 주 타깃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젊디 젊은 댄서 같은 멋쟁이 강사들도 있었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고 인생후반에 필라테스를 알게 되었다는 강사들도 있었다. 아쉽게도 한국인이나 비슷한 아시아계인으로 보이는 이민 1세대 출신은 아무도 없어서 같은 이민자의 고충을 나눌 수는 없었다. 하긴 뒤늦게 필라테스 강사를 외국에서 시작하는 늦깎이 이민자가 얼마나 될까. 인터넷을 뒤져도 젊고 예쁜 강사들은 많았지만 나처럼 뒤늦게 강사를 시작하거나 특히 외국에 있는 사람은 찾기가 힘들었다. 예상은 했지만 약간 실망했다. 그렇지만 스튜디오에서 만나는 선생님들에게 강사생활은 어떤지 설문하면서 나는 일종의 응원 같은 대답들을 들었다. 이왕 하는 거 즐기라는 조언처럼 그 대답들이 말없는 응원물결이 되어 나를 받쳐주는 느낌이 들었다. 아주 따뜻한 물결. 그래. 나도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일단 질러볼까? 한동안의 시간과 돈을 투자할 수 있다면 불가능하지 않다고 한 강사가 나에게 말해주었다. 그렇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운동을 40이 돼서 그것도 미국에서 내가 가르칠 수 있을까? 자신 있게 대답하기에 내가 너무 초라해 보였다. 나보다 훨씬 더 잘하는 다른 사람들도 안 하는데 내가 할 수 있을까? 미국인도 아니고 내가? 아이를 남편이 맡아줘야 하는데 잘 될까? 돈이 들어가는 만큼 성과도 내야 할 텐데 미국 사람들을 내가 가르친다는 게 말이 되나? 영어는? 용어가 어렵던데. 잘 알아들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치 심연을 들여다보다 빠질 것처럼 고민은 더 큰 미궁이 되어 나를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고민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남편에게 의견을 물으니 일단 시작하란다. 스케줄이 가득한 주말에 아이들을 전담해 주겠다고.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는 남편이 고맙고 든든했다.
하루에도 계속 바뀌는 마음을 가지고 강사코스상담을 진행했다. 500시간의 몰입도와 거의 두 달간 매주말 이어지는 워크숍, 100시간의 청강, 해부학을 비롯한 이론공부와 필기시험, self practice, 보조티칭 70시간, 실기시험까지. 설명을 듣는동안 일종의 흥분과 동시에 갑작스러운 부담이 나를 덮쳤다. 그러나 나를 가르쳐줄 마스터 선생님은 내가 이미 수업을 듣고 있는 강사였고 그녀 또한 나보다 나이가 많으며 딸을 둔 엄마이기도 했다. 아이가 어릴 때 많은 일을 하지 못하다가 크면서 더 많은 커리어를 쌓고 마스터 강사가 되어 있었던 그녀의 모습이 또 하나의 말없는 응원으로 느껴졌으니 이 정도면 거의 나는 이미 모든 상황을 내가 보고 싶은대로 보고 듣고 싶은대로 들었던 것도 같다.
무너진 체력을 일으키면서 나는 조각난 나의 자존감도 조금씩 다시 주워서 다시 원상태로 맞추고 싶었다. 몸이 살아나니 정신도 살리고 싶었다. 이런저런 조건을 다 따지다가 내 인생 다 갈것같았다. 두 명을 낳는 일을 간신히 성공(?)했으니 이제 나를 위한 일을 좀 해보자. 남들은 애들 좀 크고 새로운 일도 찾는다던데 늦게 아이를 낳은 내가 그걸 기다리다가는 은퇴할 나이가 될 것같았다.
그렇게 나는 해가 지나기 직전 12월 둘째의 걸음마와 때를 같이 하여 미국 필라테스 강사를 위한 첫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