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New York, Ossining

나는 두렵지 않았다

by 후이빈


“쯧쯧 … 썩어가네 썩어가..”

나이 오십이 넘은 딸에게 이제 잔소리라고 해봐야 내 귀에만 들어오는 듯하지만, 이 냉장고를 보면 내가 일찍 죽으면 이 음식 다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든다. 먹지도 않을 거면서 딸기는 왜 이렇게 많이 사서 넣어놨는지.. 마치 한 번씩 열어봐 주기를 기다리는 듯 반짝거리는 딸애집 새 냉장고 안에는 치즈며 음료수가 가득하고 언제 먹으려고 사다 놓은 건지 벌써 일주일째 딸기가 없어지지 않는다.

두 부부는 맞벌이로, 두 손자는 학교로 집을 비우기 일쑤여서 결국 이 집 냉장고는 내가 제일 많이 열어보게 된다. 시들시들 상해 가는 야채가 보기 싫어 뭐든 얼른 요리해 놓아야 안심이 되는 나는 이제 냉장고를 열 때마다 “얼른 먹어치워 버려야지”라고 혼자 중얼거리는 게 습관이 되어 버렸다.


평생 동안 나와 함께 사는 딸애는 결혼한 뒤로 정원이 있는 큰 집을 사서 차고를 개조해 내 집을 만들어주었다. 집 앞에는 내가 정성스레 가꾸는 화초들이 가득한 화단이 있고 이층짜리 내 집은 창문으로 누가 딸 애집에 들고 나는지 훤하게 보인다. 해가 잘 들지 않아 봄에도 바람이 차지만 나는 내가 그린 그림이며 옷 따위를 걸어놓고 나만의 공간을 가꾸며 살 수 있는 이 집이 꽤 만족스럽다. 그렇게 평생을 같이 살았으니 자연스럽게 딸대신 매일같이 첫째 손자를 등하교시켜 주었고 둘째 손자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춰 구워낸 라자냐가 몇 판인지 모른다. 둘째는 학교가 파하고 배가 고파질 때쯤이면 한달음에 달려와 나에게 냉면이며 불고기를 해달라고 난리다. 유럽에서 온 지 아빠를 닮아 생김새가 너무 이국적이다 싶다가도 냉면 맛을 어찌 아는지 한 그릇을 뚝딱 하는 걸 보면 천상 내 손자지 싶다. 어릴 때는 어디서 배워왔는지 ‘할머니 똥개!’라는 말을 떼쓸 때마다 써먹어가며 나를 힘들게 하더니 어느새 내 키를 훌쩍 넘어 다 커버렸다. 요새는 면허시험을 보고 와서는 내 차를 운전시켜 달라고 어찌나 조르는지 이제 운전해 줄 일도 없겠구나 싶은 마음에 은근히 섭섭해진다.


하긴 그게 없다고 내가 어디 심심하랴. 나는 언제나 바쁘다. 애들의 식사를 책임지고 집을 청소하러 오는 청소부스케줄을 조정하고 화단을 가꾸고 서예를 한다. 매일신문을 읽고 중국어며 영어코너를 오려 공부를 하고 뜨개질을 한다. 나이 팔십 줄에 이렇게 활동적이고 바쁘게 살아갈 수 있다니 감사하면서도 순간 나 자신이 자랑스러워 우쭐한 마음이 든다.

결국 나는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그대로 있던 토마토소스가 눈에 밟히던 차에 냉동고에 있던 해물을 더해 스파게티를 만들었다. 새로 산 통밀로 만들었다는 스파게티면을 끓이고 해물을 넣은 소스를 금방 요리해 저녁을 차려놓으니 새삼 강한 식욕이 느껴진다. 남들은 나이가 들수록 식욕도 없어진다는데 변함없는 내 식욕은 이제 교회에서 은근한 자랑거리다. 일요일 예배가 끝나면 어김없이 맥도널드에 모여 커피를 시키고 앉아 턱이 빠지게 재밌는 농담보따리를 풀어놓기 바쁜 우리 노인네들 중에는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다. 아들집에서 손자 보며 사는 장복자는 맨날 위가 아프다 하고 부인과 사별하고 한국에 있는 할망구와 바다를 오가며 연애를 하고 있다는 최 씨도 틀니가 불편하다며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 노인네들을 보면 한편으로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나 스스로가 뿌듯하다. 뭐든지 잘 먹어야 건강하지..


한껏 부른 배를 두드리며 이층 내 방에 올라와 여느 때처럼 뜨개바늘을 손에 쥐고 소파에 앉는다. 예전엔 앉으면 스웨터 한 벌씩은 뚝딱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속도뿐 아니라 기억도 느려져만 간다. 어제 어디까지 땄더라.. 무늬가 이상한데.. 꼬였나?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다시 손이 움직인다. 화장대에는 딸애가 오늘 빌려온 한국비디오가 한아름 쌓여있다. 정말이지 비디오를 볼 때마다 광고가 점점 많아져서 짜증이 밀려온다. 하긴 티브이 프로그램을 복사해서 대여하는 그 틈을 비집고 저렇게 광고를 집어넣는 걸 보면 정말 한국인이 대단한 거지. 일일드라마와 쇼프로그램사이에 뭘 볼까 잠시 생각하다가 언제나처럼 가요무대를 집어든다. 손자말에 따르면 요새는 비디오 빌릴 것도 없이 컴퓨터로 다 볼 수 있다던데. 돈도 안 내고 공짜로 본다고 하니 보여주는 회사는 뭘 먹고 사는 건지 얼른 이해가 안 되지만 시청자로서는 손해 볼 게 없는 일 아닌가. 얼른 배워서 보고 싶지만 컴퓨터를 켜고 어디로 뭘 어찌어찌하라는 손자의 설명을 듣다가 이내 귀찮아져 버렸다. 조만간 꼭 다시 배워서 인터넷으로 드라마 ‘미안해 사랑해’를 보고 싶다는 마음은 있으니 언젠간 하겠지..


오늘은 마침 6.25 기념 무대란다. 패티김이며 늙다리 할아버지들이 잔뜩 나오네.. 6.25 시절 부르던 노래가 흘러나온다.. 아 저 노래.. 저게 몇 년 전이야.. 노래에 소질에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수를 놓고 그림을 그리는 건 하루 종일 해도 재밌는데 음악에 소질이 없는 게 아쉽단 말이야.. 난 좋아했던 노래도 아니었는데 노래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어느새 마음이 측은해진다. 모든 것을 나이 탓으로 돌리는 고루 타분한 늙은이들 틈에 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나이가 들면서 음악을 듣거나 글을 읽으면 마음이 쉽게 동하고 또 흔들리는 것은 사실이다. 80년이라는 긴 시간을 살았으니 내가 살아온 기억들이 마음의 대부분을 꿰차고 들어앉아 음악에 동하고 글에 동하는 거겠지. 나의 기억들. 노래와 함께 신기하리만큼 선명하게 떠오르는 피난길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스무 살에 어딘지도 모르는 도망길을 떠나는 나를 배웅해 주던 아버지의 걱정 섞인 표정. 그때가 생전의 마지막 모습인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떠나던 나. 전쟁은 그렇게 내 인생의 한 부분을 차지해 버렸다. 그때는 그냥 살아남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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