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나 그리고 가족

나는 두렵지 않았다

by 후이빈


나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

내가 태어날 즈음 둘째 오빠하고 부모님은 강원도 산골 삼척 남쪽에 있는 울진군, 망양리 바닷가 마을에 살았다. 나는 8남매 중 막내로 나를 낳으실 때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세 살 많은 마흔두 살이셨다. 노산인 데다가 애 낳기가 어찌나 힘이 들던지 자그마치 3일을 걸려 낳으셨다 한다. 요즘시대에도 40이 넘어서 애를 낳는 것은 노산인데 그 당시에는 어땠을까 짐작도 가지 않는다. 정말 동네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 모두가 어머니를 걱정했다고 한다. 하루는 어머니를 위해 아버지가 십리나 걸어서 한약을 지어 집에 돌아왔는데 어찌나 추웠던지 아버지 수염에 고드름이 대롱대롱 달렸었다고 할 정도였으니. 그렇게 힘든 뒷바라지 후에 나온 나를 보시고 아버지는 계집애가 사람을 이렇게 애먹이냐시며 갓 나온 신생아 엉덩이를 한대 세게 쳐버렸다고 한다. 아버지가 너무 세게 때려서 내 인생이 이렇게 평탄하지 않았나 가끔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는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항상 무서웠다. 다른 언니 오빠들에게는 너무나 엄하셨어도 막내인 나한테는 아주 순하게 하셨는데도 언니오빠들이 어찌나 무서워하던지 옆에 있는 내가 덩달아 지레 겁을 잔뜩 먹곤 했다.

나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우리 마을은 학교 다니는 사람도, 다닐 학교도 없을 정도로 시골이었다. 가장 가까운 학교는 20리나 걸어 나가야 겨우 하나가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당연히 내 주변 동네 여자애들은 대부분 학교를 가지 않았으나 아버지는 신기하게도 그래도 여자 하나는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그렇게 해서 처음 소학교를 갈 때 내 나이는 9살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 같지만 나는 학교 가기 전 그러니까 8살 때까지 젖을 먹었다. 어머니 나이 오십에도 젖이 나온다는 게 가능한가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때 내가 먹었던 젖이 얼마나 달짝지근하고 맛있었는지 생생하게 기억한다. 내 손자는 아마 이해하지 못하겠지. 쿠키도 아이스크림도 , 아무 간식도 없이 한 달을 보내고 처음 먹는 달콤한 초콜릿맛이라고 하면 이해할 수 있을까.


처음에 20리가 넘는 거리를 걸어가는 것만도 나에겐 큰 도전이었지만 교실에 앉아있는 것 자체도 나에겐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했다. 처음 교실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생전 처음 보는 많은 수의 까만 머리애들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일제히 나를 쳐다보는 모습에 적잖이 놀랐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굳은 얼굴을 하고 나를 향해 쏟아지는 백여 개의 눈길을 피하느라 누가 앉아있는지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어쩌면 남자에 비해 여학생이 유난히 적어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학교에는 여자가 나를 포함해 채 다섯이 되지 않은 데다가 그중에는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었다. 여학생들은 등교할 때 짧은 까만 저고리와 치마에 긴 양말과 운동화를 신고 검은 보자기에 교과서를 싸가지고 다녔다. 학교 교과서는 우리나라말로 되어 있었는데 무엇을 얼마나 재미있게 배웠었는지 기억이 선명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기억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해와 바람의 싸움이야기다. 어떤 신사가 길을 가는데 바람과 해가 그 사람을 두고 누가 먼저 그의 코트를 벗기나 싸움이 붙어 결국은 해가 신사의 코트를 벗겼다는.. 나는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의 햇볕은 그 오래된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 아닐까?


학교를 가는 날의 대부분은 공부가 아니라 반공연습하느라 보냈다. 내가 무엇을, 왜 하는지 그때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우리는 그냥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노래를 배웠고 우리를 해치려고 언제나 엿보고 있다는 외국 적들을 용감하게 물리치는 그림을 그렸다. 학교가 파하면 또다시 먼 길을 걸어 집에 와야만 했는데 내 기억에 6학년때는 학교가 파하면 날이 깜깜 해지곤 해서 삼삼오오 아이들이 모여 20리 길을 함께 걸어왔다. 우리 동네에는 전기가 없어 호롱불이나 등잔불을 켜고 살았기 때문에 해가 지면 달과 별빛에 의지해야 했다. 그렇게 소학교에서의 시간은 금방 흘러 6년을 다니는 동안 언니 오빠들은 하나둘씩 어른이 되었고 나는 십 대가 되었다. 이미 언급했듯 학교를 다니는 여자애들 자체가 거의 없었기에 당연히 졸업 후에 진학하는 여자애들은 더더욱 없었다. 내가 유일하게 동네에서 소학교를 마친 여자애였고 어른들은 여자애가 공부를 더하면 시집갈 데가 없다며 딱 잘라 말하셨다. 나로선 크게 슬퍼할 일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나는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기보다 알록달록한 예쁜 천에 수놓기를 더 좋아했다. 내 언니들 중 하나는 동네촌장님 딸과 친하게 지냈는데 저녁이면 수를 놓으러 그 집에 놀러 가곤 했다. 수가 놓고 싶었던 나는 언니를 따라가겠다고 밤이 되면 고집을 부리는 통에 엄마한테 매도 많이 맞았다.


여자에 대한 옛 관습이 그렇듯 그때는 가난한 집 여자애들을 미리 시집으로 데리고 가서 17살 될 때까지 일을 시키다가 아들과 결혼을 시키는 민며느리제가 널리 퍼져있었다. 그때도 나는 아주 못된 제도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어쩔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나는 나만 휘말리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11살 즈음인가, 하루는 하교해서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좀 시무룩해 보이길래, “엄마 무슨 일이야? “ 하고 물었더니 엄마는 인상을 찡그리며

“아휴~ 너 불쌍해서 어쩌냐! 니 아버지가 너 시집보내려고 허락을 받고 왔단다. 세상에!”

하시는 것이었다. 나만 피해 가면 된다고 생각해서 하늘이 노하셨나. 하필이면 왜 내게! 어머니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정말이지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것 같은 충격에 땅바닥에 앉아 어머니 앞에서 땅을 치며 울었다. 세상이 나를 버리는 것 같아 목이 터져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눈물이 범벅이 되어 안 간다고 부르짖었다. 어머니는 내가 자지러지는 모습을 보시고는 놀래서 뛰어 오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어찌 나오나 궁금하신 어머니가 나에게 장난을 치신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어머니는 절대로 결혼에 관한 농담을 하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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