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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동 Oct 26. 2022

황금빛 아파트에 살고 싶지 않아

저 집에선 문을 열자마자 땅을 밟을 수가 없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겉모습은 63 빌딩과 다를 바 없는 황금빛 아파트 32층에서 영어 과외를 받았다. 선생님이 우리 집으로 오는 게 아니라 내가 선생님 댁으로 가는 식이었다. 로비에서 경비 아저씨께 인사를 드리고, 비디오폰으로 선생님을 호출하면 스피커로 '삐리 비리비리비리 비~' 단조로운 '엘리제를 위하여' 비프음이 흘러나왔다. 이 우아한 선율은 언제나 첫 두 마디 정도 연주되다가 뚝 끊겼다. 위층에서 누군가가 인터폰을 받았다는 소리였다. 그러면 어린 나는 "선생님 저예요!" 있는 힘껏 소리쳤고, 자동문은 날 반기듯 스르륵 열렸다. 로비 안에는 바깥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유리 엘리베이터가 두 대 있었다. 나는 그중 더 빨리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32층까지 올라갔다. 그러면 선생님이 현관문을 활짝 열고 날 맞았다.


어릴 적의 나는 이 기묘한 루틴을 사랑했다. 마치 중요한 미션 때문에 우주로 출동하는 슈퍼히어로 같았다. 내가 로비에서 신호를 보내면 위층에 있는 선생님이 응답했다. 자동문이 열렸고, 내가 탄 엘리베이터는 하늘로 솟아올랐다. (로알드 달의 동화 <찰리와 유리 엘리베이터>의 한 장면처럼.) 가끔 선생님이 집에 안 계실 때면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직접 입력해 문을 열었다. 나는 이것이 디지털 금고의 암호를 해제하는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끔은, 영화 속 주인공에 빙의해 암호를 일부러 틀렸다. 그리곤 혼자 머쓱해했다. 은색으로 빛나는 동그란 숫자 버튼들을 꾹꾹 누르는 일은 아무리 반복해도 질리지 않았다.


영어 선생님을 만나러 가는 길은 언제나 무척 설렜다. 일종의 게임 같기도 했고, 선생님의 아파트는 세상 사람들이 '부럽다'라고 말하는 집의 전형이었으니까.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명제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집은 과연, 모두에게 살기 좋은 공간일까?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런가 싶다가도, 골똘히 생각해보면 갸우뚱하게 되는 부분들이 많았다. 이를테면 저 집에선 문을 열자마자 땅을 밟을 수가 없었다. 영어 선생님의 집은 멋졌지만 — 천장에 달려있는 값비싼 샹들리에와 고풍스러운 클래식 피아노는 집안에 멋을 더했다 — 32층에 위치했기에 밖으로 나가기 위해선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다. 엘리베이터가 32층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그 엘리베이터가 1층까지 내려가는 데 또 얼마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반면 당시 내가 살던 집을 떠올려본다. 오래된 다세대주택 1층. 현관에 놓여진 운동화를 구겨 신고 마당으로 나가면 곧장 단단한 흙바닥을 디딜 수 있었다. 문을 열어놓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집 안이 바람이 가득 찼다. 문을 열고, 기나긴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그 안에 몸을 싣고, 자동문을 통과할 필요가 없었다. 큰 보폭으로 스무 걸음만 가면 집에서 가장 가까운 마트 입구에 다다랐다. 아파트에선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가끔은 동네 길고양이들이 현관 앞까지 찾아와 야옹야옹 울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은 질색했지만, 나는 고양이들의 울음소리가 언제나 반가웠다. 내가 아닌 다른 생명체도 이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뜻 같아서. 자연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은 나에게 큰 안정감을 주었다.


어느 순간 나는 휘황찬란하게 긴 이름을 가진 선생님의 아파트보다 우리 집이 더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서늘한 바람과 단단한 땅은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이었다. 황금빛 아파트는 더 이상 내 인생의 이상향이 되지 못했다. 그곳에선 문을 열자마자 땅을 밟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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