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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동 Oct 30. 2022

청춘의 땅 시드니의 배신

시드니에서 살아남기 Part 1

시드니(Sydney). 매년 부푼 기대를 안은 청년들이 밀물처럼 밀려드는 도시.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워킹홀리데이 데스티네이션.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워홀러들은 생활비를 절약하기 위해 최대한 저렴한 숙소를 찾아 헤맨다. 그리고 생각한다. 눈과 비를 막아줄 지붕과 몸을 누일 수 있는 바닥만 있다면 나머지는 젊은이의 열정과 패기로 어찌어찌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기회를 포착한 교활한 집주인과 사업가들은 괴이한 방들을 만들어낸다. 렌트비는 상대적으로 저렴하지만, 도저히 집이라고 부를 수 없는 그런 형태의 집을.


2017년 겨울, 대학교 해외 인턴 프로그램에 지원해 최종 선발되었다. 뛸 듯이 기뻤다. 교환학생의 경험을 제하면 이렇게 오랫동안 외국에 나가보는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려 호주라니! 밤이 되면 오색 빛깔로 빛나는 오페라 하우스, 들판을 뛰어다니는 귀여운 캥거루와 왈라비, 끝내주는 풍미의 플랫화이트가 눈앞의 현실로 펼쳐질 터였다. 남반구에 위치한 미지의 땅, 호주에서 청춘의 2악장을 써 내려갈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 가지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다. 인턴십을 주관했던 단체에서 체제비만 지원해줄 뿐, 주거를 책임져주진 않는다고 했다. 큰 걱정은 없었다. 내가 여기 언어를 못 하는 것도 아니고, 시드니는 워킹홀리데이를 하러 온 외국인들이 많은 대도시니까, 집을 구하는 게 그렇게 힘들진 않겠지. 시드니 중심가에 값싼 에어비앤비를 하나 잡아두고 온종일 집을 보러 다녔다. 호주의 직방과 비슷한 Gumtree, 호주나라 사이트에 상주하며 매일같이 올라오는 매물들을 관찰했다. 대략 30개 정도 되는 방을 나흘 만에 몰아봤다. 센트럴 근처의 피어몬트(Pyrmont), 레드펀(Redfern), 써리힐즈(Surry Hills)부터 한국인 밀집 구역인 스트라스필드(Strathfield), 리드콤(Lidcombe), 챗스우드(Chatswood)까지 거의 모든 동네를 찍먹 해본 것 같다.


공고들을 살펴보다 보니 생각보다 고민해야 할 것이 많았다. 렌트비부터 시작해 위치, 치안, 수도꼭지의 수압, 함께 사는 룸메이트의 생활 패턴까지 모든 게 고려 대상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신경이 쓰였던 건 '직장과의 거리'였다. 일터와 너무 먼 곳에 집을 구하면 돈과 시간이 배로 들 것이었다. 반면 직장과 집이 너무 가까우면 시내 중심가라 렌트비가 너무 비쌌다. 주변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하니 일단 집을 한 번 보러 가보라고 했다. 호주에선 그걸 인스펙션(* inspection, 집을 점검하러 가보는 행위)이라 불렀다.




첫 번째 집

제일 처음 인스펙션을 간 집에는 거실이 없었다. 아니, 거실이 있긴 했는데 캐리어로 가득 차 있었다. 집에 짐이 너무 많아 거실을 창고로 쓰는 듯했다. 방 두 칸짜리 집에 짐이 왜 이리도 많은지. 안방에 들어가고 나서야 의문이 풀렸다. 사람이 많으니 짐도 많은 거였다. 안방에 있는 2층 침대만 세 개였다. 그 안에서 여섯 명의 사람들이 뒤엉켜 살았다. 사람이 많다 보니 하루 동안 나오는 쓰레기의 양도 엄청났다. 아파트 분리수거장을 방불케 할 만큼 커다란 쓰레기통이 부엌 곳곳에 비치돼 있었다. 쓰레기가 있는 곳엔 역시나 벌레가 함께. 집을 구경시켜주는 '마스터'가 화장실 불을 켜자마자 바퀴벌레 몇 마리가 사샤삭, 스쳐 지나갔다. 윽, 이 집은 아니다...


두 번째 집

다음 날 방문한 곳은 키 셰어(keyshare)를 하는 집이었다. 키 셰어는 말 그대로 집 열쇠를 여러 명의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다. 열쇠를 공식적으로 복사해서 나눠 가지면 제일 좋겠지만 여기선 그럴 수 없다. 한 집에 이렇게 많은 인원이 모여 산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처벌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드니에 있는 대부분의 셰어하우스는 불법적으로 운영된다) 키 셰어를 하는 경우 보통 두세 명이 한 팀이 되어 하나의 키를 사용했다. 교대로 열쇠를 갖고 외출을 하기도 하고, 지정된 우편함에 열쇠를 넣어두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타이밍이 안 맞으면 키가 없어 집 앞인데도 집 안에 못 들어가는 상황이 발생한다고 했다. 내가 내 집도 자유롭게 못 드나든다고? 너무 불편해 보였다. 이 집도 패스.


세 번째 집

이번엔 '거실 셰어'를 하는 집에 갔다. 좁다란 거실을 2~4인이 쓴다고 했다. 보통 매트리스나 얇은 천막 같은 것으로 구역을 나눴다. 사생활 보호가 될 리 없었다. 모든 소음과 냄새와 불빛이 공유됐다. 한밤중에 누군가 화장실을 간다고 하면 볼일 보는 소리가 온 집 안에 서라운드로 울려 퍼졌다. 거실 셰어를 하는 집에서 '거실'은 본래의 역할을 잃었다. 휴식을 취해야 하는 공간이 사람과 짐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진짠지 누가 만든 괴담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이런 소문을 들은 적도 있다. 어떤 셰어하우스에 권장 수준보다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들어와 사는 바람에 건물이 폭삭 무너졌다고.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했지만 곱씹어보니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닌 것 같았다. 거실 셰어하는 집을 인스펙션하다 보면 한정된 공간 안에 사람이 너무 많이 살아 지금 당장 집이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네 번째 집

공고에 쓰여있는 '썬룸 독방' 네 글자가 눈길을 끌었다. 그 단어가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일단 방을 보러 갔다. 썬룸(sunroom)이란 본래 아파트 발코니였던 공간을 개조해 방으로 만든 것이었다. 직접 가서 보니 방의 한쪽 면이 전부 유리라 온도 변화에 무척 취약해 보였다. 뜨거운 태양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이면 쪄 죽을 것 같았고, 찬 바람 쌩쌩 부는 겨울이면 얼어 죽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홀러들 사이에서 썬룸의 인기는 높았다. 적어도 독립된 나만의 공간이 보장되는 방의 형태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렌트비도 비쌌다)




나는 오랜 고민 끝에 회사까지 걸어서 7분 정도 걸리는, 구축 아파트에 들어가기로 했다. 위생적으로 아쉬운 점이 많았지만, 시드니의 기괴한 집들 가운데선 나름 경쟁력이 있는 편이었다. 먼저 그 아파트엔 집주인 언니와 내 룸메이트, 딱 세 명만 살았다. 거실은 널찍했고 가끔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볼 수 있었다. 카드키는 오직 나 혼자 사용했다. 위치는 또 얼마나 좋은지, 시드니 타운홀 지하철역이 코앞이었다. 20년 동안 청소기 한 번 돌린 적 없다던 바닥 카펫 ─ 본래 색깔이 뭔지 가늠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새까맸다 ─ 과 부엌 곳곳에 떨어져 있는 바퀴벌레 시체, 욕실 줄눈 사이사이 껴있는 곰팡이 정도는 참고 견뎌야 했다. 한정된 예산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 집에서 세 달 정도 살았다.


어느  아침 기침을 했는데 목에서 누런 가래가 나왔다. 태어나서 비염이나 호흡기 질환으로 고생한  없던 나인데 코로  쉬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안의 바퀴벌레도 변수였다. 여름이 되자 세이프존이라 여겼던 냉장고 내부에서마저 새끼 바퀴벌레가 발견됐다. 웩. 비위가 상해 집에서 음식을 해 먹을  없었다. 회사에서  멀어도 깨끗한 집에서 살고 싶다는 욕구가 쑥쑥 자라났다. 청춘의 패기는 이정도면 족했다. 그렇게 나는 이사를 가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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