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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동 Oct 30. 2022

저는 보모가 아니거든요

시드니에서 살아남기 Part 2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새끼 바퀴가 쪼르르 기어가는 모습을 목격한 그날, 이사를 결심했다. 극악의 위생 상태를 경험한 직후라 그런지 어떻게든 깨끗한 셰어 하우스에 들어가고 싶었다. 회사와는 조금 멀어져도 좋았다. 깔끔하기만 하다면 말이다. 그렇게 난 한인 밀집 지역 리드컴(Lidcombe)에 있는 셋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내가 이사를 간 집은 두 살짜리 아이와 30대 초중반으로 보이던 부부가 살던 아파트였다. 그 아파트에는 방이 두 개였고, 부부는 자신들의 방을 제외한 나머지 방에 세를 주고 살았다. 아내는 임신 5개월이라 했다. 내가 입주할 당시 배가 이미 남산만 한 상태였다. 두 살짜리 큰 아이는 인스펙션을 하는 내내 계속해서 칭얼거렸다.


집 안은 아기가 있어서 그런지 정말 깔끔했다. 그 어디에서도 벌레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고, 유아용 장난감과 푹신한 매트, 젖병소독기 같은 것만 눈에 띄었다. 당시엔 그것들이 모두 청결함의 지표처럼 느껴졌다. 회사에서 거리가 조금 먼 것을 제외하면 훌륭한 집이었다. 집주인 언니는 가족 같은 분위기를 지향한다고 했다. 대뜸 내게 타지에 와서 일하느라 힘들진 않냐고 물었다. 사려 깊은 집주인에 청결한 집이라. 여기다, 싶었다. 그렇게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어린아이가 있는 집에 산다는 건 상당히 귀찮은 일이다. 그렇지만 나라는 사람 자체가 원래 아이를 좋아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아이보다도, 깔끔한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사실에 더 설렜다. 부엌에 있는 인덕션은 반짝거렸고, 모든 주방 집기들은 새 것이었다. 요리를 자주 하게 됐다. 가끔 부엌에서 또띠아 피자나 알리오올리오 파스타를 만들어 주인 부부에게 대접하기도 했다. 주인집 언니가 임신을 한 상태니 기분이 울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종종 말벗이 되어주었다. 두 살짜리 아이에게 영어 동화책을 읽어준 적도 여러 번이다. 그러면 주인집 부부가 정말 좋아했다.


나는 당시 9 to 6 근무가 기본인 공공기관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퇴근을 하고 나면 늘 진이 빠졌다. 그럼에도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언젠가는 언니가 공용 냉장고에 넣어둔 내 개인 음식을 말도 없이 먹어 놓고는, '아 그거? 내가 먹었는데... 똑같은 거 내일 마트 가서 사다 놓을게.' 했던 적이 있었다. 회사에서부터 저녁 메뉴를 생각해두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냉장고를 열었는데, 먹으려 했던 음식이 없을 때의 그 상실감이란. 그렇지만 거기까지도 괜찮았다. 호르몬의 영향으로 본인의 행동을 주체할 수 없었던 어떤 임산부의 실수였다고 생각했다. 임산부는 '입덧'이란 걸 하잖아. 내가 넓은 아량으로 주인집 언니를 이해해야지. 그런데 이후에도 몇 번이나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점점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어졌다.


어느 날이었다. 시드니에서 열리는 커다란 행사를 주관하게 된 나는 자연스레 주말 출근을 하게 됐다. 10일 연속 회사에 출근 도장을 찍었고, 매일 밤 거의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주인집 언니가 시끄럽게 통화하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녀는 거실에서 남편과 전화를 하고 있었다. 아기가 아픈 것 같다며 남편에게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모습. 언니는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야겠다고 소리치곤 내 방 문을 벌컥 열었다. '뭐해? 옷 입어. 애기가 아파서 병원 갈 거야' 너무도 당당하게 도움을 요구하는 그녀의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너가 병원에서 영어 통역해줘야 될 것 같아.' 나는 분명 이 집에 렌트비를 내고 사는 '세입자'였는데... 어느 순간 집주인 언니가 날 일종의 가정부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아기의 상태가 심각했더라면 나도 지친 몸을 이끌고 병원에 가줬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꾀병을 부리는 것 같았고, 언니의 태도가 너무 뻔뻔했다. 저 사람은 왜 '가족'이라는 애매모호한 단어로 사람을 홀린 뒤 가사노동을 전가하는 걸까? 언니는 나뿐만 아니라 스무 살짜리 다른 세입자 여자 애에게도 본인의 육아를 자주 떠넘겼다. 아이 어린이집 픽업부터 시작해 슈퍼마켓에서 장보는 일, 사소한 심부름까지 갖가지 집안일을 은근히 종용했다. 가끔은 혐오스러웠다. 어떻게 이게 '가족'일까? 전문적으로 집안일을 담당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면 보모나 오페어(au pair)를 구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들은 돈을 아끼고 싶었던 건지, 알고도 모른 척 했다.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주인집 부부에게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언니, 한 집에 사는 사이일수록 서로에게 더 조심스러워야 해요. 그 얘기를 들은 집주인은 불같이 화를 냈다. '내가 널 얼마나 생각해줬는데?' 집주인은 급기야 초강수를 던졌다. '오늘 당장 우리 집에서 짐 싸서 나가!'


집주인은 자신만만했다. 알고 보니 이들은  몰래  방을 내놓은 상태였다. 내가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몇십 명의 사람들이  방에 와서 인스펙션을 하고 갔다고 했다.  뜨고  베인 격이었다. 직장에서  얘길 전해 듣고 혼자 화장실에 들어가 엉엉 울었다. 정말 너무해. 이렇게 하루아침에 세입자를 쫓아내는 집주인이 어딨어. 지난 5개월 동안 불어난  많은 짐들을 정신없이 포장할 생각에,  거처를 구하러 다닐 생각에, 회사에 눈치 보며 양해를 구할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한국이었다면 본가로 피신했을 텐데 여기선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나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산다고 했다. 불의한 일을 당했지만 이대로 무너지라는 법은 없었다. 나는  그래 왔던 것처럼 지식으로 무장했다. 호주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호주인 친구에게 자문을 구했다. 강제 퇴거는  어떤 상황에서든 불법이고, 방에 있는  물건에 손이라도 댔다간 고소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집주인들에게 똑똑히 전달했다. 법을 들먹이자 부부는 유순해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시퍼렇게 날을 세우던 사람들이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부터 그럴 것이지.) 정신없이 집주인과 싸우는 동안 계절이  차례 바뀌었다. 어느덧 한국으로 돌아갈 시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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