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그때 우리는 공동 육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억이 희미할 정도로 어렸을 때 일이다. 낮잠을 곤히 자다가 눈을 떴는데, 온 집안이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엔 꿈인가 싶었다. 코끝을 찌르는 탄내가 너무 지독해 이 모든 게 현실임을 알았다. 자욱한 연기를 헤치고 안방에 들어서니 멀리서 동생의 형체가 보였다. 동생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저 상태로 정신을 잃은 건가? 아니, 자세히 보니 아홉 살 동생은 티비가 뚫어지도록 <디지몬 어드벤처>를 보던 중이었다! '야 정신 차려, 일어나!' 상황 판단이 안 돼 보이는 동생의 손을 억지로 끌고 집 밖으로 나왔다. 종착지는 뻔했다. 우리 집 옆 건물 1층에 있던 '형제세탁소'. 문을 열고 거친 숨을 내쉬며 세탁소 사장님에게 외쳤다.
"아저씨, 저희 집에 불이 났어요!"
스팀다리미를 들고 뿌연 김을 칙칙 뿌리던 세탁소 아저씨는 우리 남매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저씨의 손을 잡고 집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부엌 창문 쪽에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저씨는 망설임 없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연기를 헤치고 부엌에 진입했다. 문제의 원인은 가스불이었다. 엄마가 가스레인지에 냄비 올려놓은 걸 깜빡하고 외출을 하는 바람에 생긴 사고였다. 아저씨는 연기 속에서 가스 밸브를 잠그고 밖으로 나왔다. 얼떨결에 상황 종료. 이후 소방차가 와서 사후 진압을 했는지, 우리 남매가 병원에 갔었는지 하는 건 구체적으로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세탁소 아저씨의 존재에 감사할 뿐이었다.
세탁소로 향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형제세탁소 아줌마 아저씨는 부모님을 제외하고 내가 제일 자주 만나는 어른이었다. 맞벌이를 하는 엄마 아빠가 집에 없을 때 나는 집 앞 세탁소로 향했다. 세탁소 문을 열면 언제나 아줌마나 아저씨가 나를 반겨주었다. 돈이 없으면 아줌마 아저씨에게 500원만 빌려달라고 했다. 500원이면 컵떡볶이 중자와 김말이까지 사먹을 수 있었고 '스노우 브라더스'도 열 판이나 할 수 있었다. 세탁소는 나에게 그런 공간이었다. 열쇠를 깜빡했을 때 들르는 공간. 문제가 생겼을 때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발걸음이 갔다. 생각해보면 세탁소 아줌마 아저씨는 당시 우리 부모님과 공동 육아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프리카 속담 중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 운이 좋게도 우리 동네에는 우리 남매에게 큰일이 생겼을 때 기꺼이 보호자가 되어줄 사람들이 꽤 많았다. 바로 그 동네 주민들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 덕분에 우리 남매는 무사히 성장할 수 있었다.
나는 가끔 당시의 우리가 '다세대주택'에 살았기 때문에, 서로 더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날씨 좋은 날 다같이 모여 삼겹살을 구워 먹는 건 예삿일이었고, 마당에서 등목을 하거나 함께 대규모 김장을 한 적도 있었다. 집에 정수기가 없던 시절, 2L 물통을 둘러업고 정수기가 있는 친구네 집에 찾아 가서 물을 받아온 기억도 있다. 현관 문도 거의 매일 열어놓았다. 언제 옆집 아줌마가 새로 만든 반찬을 들고 찾아올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이제 내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조차 잘 모른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삶이 팍팍해지고 여유가 사라져 타인에게 나눠줄 여분의 관심이 똑 떨어졌는지도. 다만 104호, 302호, 701호... 서로를 숫자로 지칭하는 빌라나 아파트의 문화보다는 '떡집 아줌마', '세탁소 아저씨', '옥탑방 언니' 같은 정겨운 별명으로 서로를 부르던 주택가의 문화가 더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