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껍아 두껍아. 헌책 줄게. 새 책 다오. 상태가 좋은 모든 헌책은 당연히 판매가 가능할 줄로 알았다. 오래전부터 팔고 싶었던, 처분해야 하는 책이 매우 많았기에 혼자서는 갖다 팔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부모님 댁 이사를 몇 주 앞두고 특명이 떨어졌다. "집에 남아있는 옷과 책을 모두 버리거나 네 집으로 가져갈 것." 올 것이 왔구나.
온갖 버릴 물건들로 잔뜩 어질러져 있는 부모님 댁을보니 얼마 남지 않은 이사가 실감 났다. 먼지 쌓인 책들과 몇 년 동안 방치된 옷가지들을 다시 가져가거나 버릴 생각을 하니 한숨부터 나왔다. 이걸 다 어쩐담? 다음날 바로 수거 업체가 오기로 했단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에메랄드 녹색 책상 앞으로 갔다.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오래된 책상도 이젠 폐기물 스티커가 붙을 터였다. 많은 추억과 의미를 담은 물건들 앞에서 마음이 약해졌지만 깨끗한 집을 유지하기 위해 헤어질 결심을 했다. "오늘 밤에 책 팔러 갈까?" 남편이 갑작스러운 제안을 했다. 중고서점의 영업 종료까지 딱 한 시간이 남은 상황. 빠른 손놀림으로 일단 우리 집으로 가져갈 책부터 추렸다. 그리고 버려야 할 책과 판매할 책을 분류했다.
밑줄과 메모가 많은 이전 책들을 보니 ‘깨끗하게 사용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최근에 책이 아닌 습작노트와 컴퓨터에 메모를 남기는 방식으로 독서 습관을 바꿨다. 낙서가 많은 책은 판매 가치가 없기에 열심히 확인 중인데 남편과 남동생이 자꾸만 채근했다. “일단 다 가져가자.” 작은 도서관을 방불케 하는 집인데 수백 권의 책을 무슨 수로 옮긴단 말인가.
가족들의 재촉을 견디며 나름 깨끗한 책과 전집, 상품 가치가 있는 도서를 선별하여 차에 실었다. 습하고 무더운 여름밤인지라 땀이 어찌나 나던지. 머리끈도 없는데 긴 머리카락이 목덜미에 달라붙어 몹시 성가셨다. 머리카락이 체온을 높인다는 사실을 제대로 체감하는 시간이었다.
평소에 자주 이용하는 중고 서점 부근에 도착했는데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지하에 위치한 상가로 책을 옮기는 일은 그야말로 막노동이었다. 남편과 남동생이 분주히 책을 옮기는 동안 나는 무거운 캐리어 위에 묵직한 책상자를 싣고 조심조심 이동했다. ‘바보들. 이렇게 옮기면 얼마나 편하고 좋은데.’ 역시 인간은 도구를 잘 사용해야 한다고 우쭐대던 찰나. 울퉁불퉁한 돌부리에 걸려 캐리어가 흔들렸고 책 상자가 부지직 소리를 내며 바닥 위로 다이빙했다. 온 바닥이 책으로 도배되어 행인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덥다. 창피하다. '나는 헌책을 팔러 다니는 넝마주이입니다.' 시내 한복판에서 날 좀 보소 외치는 느낌.
조금 전까지 원망하던 머리카락을 이용해 최대한 얼굴을 가린 채로 주섬주섬 책을 줍고 있는데 웬 커플이 다가왔다. 그들은 별말 없이 책을 주워서 일렬로 정리해 주더니 “저희가 가시는 곳까지 옮겨 드릴게요.”라고 했다. 맙소사. 날이 이렇게 더운데 책을 들어다 주겠다니. 그들의 고운 마음씨에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헉. 당신들 정체가 뭐야? 당장 화보를 찍어도 될 만큼 예쁘고 잘생긴 선남선녀 커플이 곁에 와있었다. 이토록 천사 같은 사람들을 고생시킬 순 없지. 옮기는 건 내가 하겠다고 손사래를 치며 몇 번이고 인사하자 그들이 주저주저하며 무겁게 발걸음을 뗐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감탄하게 만드는 커플이었다.
팔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힘들게 가져간 중고 책의 수입은 두구두구.
무려, 아니 고작 12,800원이었다. 서점에서 매입한 도서는 딱 열세 권. 열세 권의 가격이 만 원 초반대! 머리가 띵.
무조건 많은 책을 챙기라고 강요한 남동생과 남편을 노려보자 두 남자는 멋쩍게 웃었다. 십만 원은 족히 나올 줄 알았다며 허무해하는 덤 앤 더머를 보고 있으니 피로가 확 몰려왔다. 친절한 서점 직원들이 알려준 중고 책 파는 요령은 간단했다.
“방문 전에 앱을 켜고 바코드 입력을 해 보세요. 전집 같은 경우 두 권 정도 입력해 보면 팔 수 있는 책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어요.” 매입 불가 판정을 받은 책을 폐기해 주실 수 있냐고 물었더니 가능하단다. 우리 셋 다 돈을 벌자는 목적으로 중고 서점을 방문했지만 내 소유의 책을 무료로 버리고 올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지덕지할 정도로 지친 상태였다.
폐기 도서는 눈앞에서 표지가 북북 찢긴 채 분리되었다. 정든 책 친구들을 떠나보내는 내 마음이 몹시 아팠다. 손길이 닿지 않아 곰팡이가 핀 책도 있었다. 사람도 물건도 닳도록 쓰이는 게 최선이구나 하고 느꼈다. 부모님께서 밤낮으로 열심히 벌어서 사주신 책들. 오랜 시간 나를 양육한 귀한 책들을 보내는 심정이 착잡했다. 도로 가져오고 싶어도 보관할 공간이 없으므로 미련 떨기 금지. 버려지는 건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책 몇 권만을 품에 안고 중고 서점을 나왔다. 소중한 책들을 보내주고 오는 길에 차창 밖 가로등 불빛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내가 사는 집에 더 넓은 서재가 있었다면 버리지 않았을 텐데. 아니야. 잘한 결정이야.’ 상충하는 마음을 저울질하며 아쉬움에 젖어 있는데 귀에 꽂히는 남편의 목소리. “십만 원은 나올 줄 알았는데 기름값도 안 나오네.” 십만 원은 무슨. 일만 원도 겨우 벌었구먼.
책을 나르느라 기진맥진한 우리는 헌책을 팔고 받은 12,800원에 12,800원을 더 보태서 치킨 한 마리를 사 먹었다. 두껍아 두껍아. 헌책 줄게. 치킨 다오. 다음엔 치킨 반마리 말고 한 마리 정도는 꼭 부탁한다.
미니멀라이프 야매 TIP
1. 오프라인 매장 방문 전, 핸드폰 카메라로 바코드(앱 이용)를 찍어서 판매가 가능한 책인지 확인합시다. 누구처럼 무작정 몸에 이고 지고 갔다간 파스값도 안 나옵니다.
2. 헌 옷 수거와 헌책을 함께 수거하는 업체가 있으니 다량의 폐도서 처분 시 고려해 보세요. (종이 수거는 1Kg 당 삼십 원 정도밖에 하지 않으므로 수거에 의의를 둡니다.)
3. 매장 미등록 서적, 개별 가격이 정해지지 않은 전집, 입고 수량 초과 서적은 판매 불가하니 다양한 판매 혹은 기증 방법을 개척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