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치가 교통비를 아끼면 생기는 일

길모퉁이 돌고 돌다가 내가 돌아

by 미세스쏭작가

남편의 백내장 수술 이틀 전. 바쁜 그를 대신해 내과에 들러 검사의뢰서를 받아야 했다. 걸어서 이십 분 내의 거리인지라 도보로 왕복할 계획이었다. "병원 가는 길 좀 알려 줘." 소화도 시킬 겸 풀벌레가 우는 초가을 저녁에 남편과 나, 반려견 셋이서 집을 나섰다. 찌르르. 찌르르. 기분 좋은 배경음을 들으며 씩씩하게 길안내를 받았다. 남편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길치인 내게 세심한 설명을 곁들였다. "여기서 더 올라가 버리면 대학교가 나와. 그러면 한참 돌아서 가는 거니까 그것만 유의해." 진지한 남편에게 코웃음 치며 말했다. "풋. 내가 바보야? 뭐 하러 거기까지 올라가겠어. 여기 물고기 벽화 지나서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되지?" 그저 일자로 쭉 걷다가 우측으로 꺾으면 그만인 쉽디 쉬운 길이었다.


다음날 아침 반려견을 산책시킨 후 이번엔 나 홀로 산책에 나섰다. 딱 좋은 가을볕과 온도를 느끼며 시원하게 뻗은 하천길을 부지런히 걸었다. 저녁에 걷던 길이 단지 아침이 됐다는 이유로 조금 낯설다. 길치의 특권은 낮과 밤, 조명, 바뀐 건물 하나에도 매우 낯선 새로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하천 따라 쭉 걷기, 물고기 벽화가 그려진 곳에서 조금 더 일자로 올라가기, 오른쪽 샛길로 꺾기. 세 가지만 기억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병원에 당도할 수 있었다. 길을 걷다가 드디어 벽화 하나가 나왔다. '음. 이건 물고기 벽화고 어제 내가 본 건 펭귄이었던가? 맞아. 펭귄이었어.' 당당한 파워워킹으로 힌트 하나를 날려버린 채 걸었다. 걷다 보니 남편이 언급했던 문제의 대학교가 나왔다. 이것만 유의하라고 했는데 기어이 먼 길을 오고야 말았다. 다시. 뒤로 빠꾸! 오라이 오라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 가는데 딱 좋던 온도가 후덥하고 태양도 뜨겁게 느껴졌다. 덥다 더워. 다시 다리 밑으로 내려가 얄미운 물고기 벽화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금방 샤워하고 나왔는데 목덜미에 땀 젖은 머리카락이 들러붙었다. 하천에 떼 지어 사는 오리 가족을 만나 잠시 숨을 돌렸다. 나는 팔다리를 휘저으며 이리저리 열심히 걸어 다녔는데 오리들은 이따금 짧은 발을 노 저으며 물 위를 두둥실 떠다녔다. "오리가 물 위에 그냥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오리는 물 위에 떠 있기 위해 수없이 발을 움직이며 헤엄친다." 이런 글귀와 달리 오리는 아주 여유롭고 게으른 몸짓으로 물보라를 일으키며 제 갈 길을 헤쳐나갔다. 선망하던 부지런함의 상징인 오리의 이면을 보니 배신감이 들었다. '너희는 그냥 이렇게 태어난 거구나. 물 위에 떠 있는 것도 잘하고 헤엄도 잘 치도록 지어진 존재구나.' 영 맞지 않는 분야를 기웃거리며 잘하려고 애쓰던 내 모습을 상기했다. 가쁜 숨으로 발장구를 치면서 더 열심히 앞서 나가지 못하는 나를 원망했던 때가 있었다. 포기하고 싶단 생각이 들면 다리가 저리도록 헤엄치고 있을 오리를 떠올리곤 했다. 물 위에 떠 있기 위해 발갈퀴가 닳을 정도로 노력할 오리, 내가 작은 오리보다 못하다 여겨졌다. 그런데 맑은 물속에 비친 오리의 다리는 유유자적, 여유로움 그 자체였다. 오리의 헤엄을 구경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환기했다. 조금 더 헤매기를 거듭하다가 드디어 내과다 다다랐다.


"선생님이 수술 들어가셔서 의뢰서를 받으려면 삼십 분 정도 기다리셔야 합니다." 안 돼! 슬퍼하는 나를 위로해 주시는 접수처 선생님 덕분에 조용히 가방 속 책을 꺼내 들었다. 나를 기다려 주는 책이 있어서 고마웠다. 먹는 마음이라는 책을 음미하다 보니 생각보다 금방 내 차례가 왔다. 증명서를 보이고 남편을 대신해 서류를 받은 후 병원 문을 나왔다. 근처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에 책을 마저 읽으며 이번엔 헤매지 말고 귀가하기로 다짐했다.

조금 더 빠르고 편안하게 돌아가기 위해 마을버스를 따라 횡단보도를 건너고 이어지는 도로 위를 걸었다. 그러나 하천은 영영 입구를 드러내지 않았다. 한참을 걸은 후에 익숙한 건물이 보였다. 남편의 의뢰서를 받았던 바로 그 내과였다. 하. 이런 심한 욕! 대낮에 도깨비에 홀린 건가? 이번엔 주제에 꾀 쓰지 않고 정직하게 왔던 길을 되돌아가 보았다. 점차 배가 고프고 땀이 흐르고 길바닥에서 쓰러지기 직전이 되도록 그리운 하천은 뵈지 않았다. 나 보기가 역겨워 하천이 다른 도시로 망명을 갔나. 돌고 돌아 결국 버스 정류장 땅을 사뿐히 즈려밟고 섰다. "띡." 교통카드를 찍고 초록색 버스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점보 사이즈 아메리카노 덕분에 화장실은 급하고, 동네 길 하나 못 찾는 나로 인해 자괴감은 충만하고. 내가 길치인 줄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멍청할 줄이야. 나의 길치 말기 증상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앞문 다르고 뒷문 다른 길 찾기 능력이 오늘도 십분 발휘 됐다. 심각한 길치에게 인터넷의 지도는 암호가 가득한 그림일 뿐이었다. 교통비 천오백 냥 아끼고 걷기 운동 좀 해보겠다고 나섰다가 반나절 미아를 체험했다. 남편은 나의 고행길 후기를 듣고 너무나 대단하다(?), 고생이 많았다고 위로했다. 난 정말 대단한 인간이다. 베트남에서는 지도 앱을 켜고 남편이 있는 곳까지 척척 잘도 찾아가서 그를 심히 놀라게 했는데 오늘은 도깨비가 울고 갈 길 찾기 실력 선보였다. 길눈이 어두운 덕에 이만 보는 족히 걸은 듯하다. 운동은 아는 길에서나 즐기고 웬만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겠다. 세 개의 발가락으로 제 갈 길을 잘도 개척하는 오리가 새삼 경이롭다. 나의 패배를 인정하는 기념으로 일은 오리 가족을 만나러 가야지. 펭귄이 아닌, 물고기 벽화가 보이거든 그 길로 얼른 집으로 되돌아올 것.

내 눈에는 오직 밤이었소. -CCM 실로암의 가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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