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 대신 닭가슴살

몸과 화해하는 한 끼

by 미세스쏭작가

먹는 데 진심인 우리 부부는 메뉴를 정할 때마다 최선을 다하는 편이다. 한 끼 식사에 한식, 중식, 일식, 양식 등 모든 메뉴가 언급되는가 하면 주문의 마지막 순간까지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듯 고심한다. 가장 취향에 맞는 메뉴를 고르기 위해 팔 할의 시간을 쏟지만 먹는 시간은 이 할에 불과하다. 고민이 무색할 만큼 순식간에 음식을 먹어치우고 곧바로 디저트에 손을 대는 것이 우리 부부의 식습관이다. 덕분에 살이 친구 하자고 자꾸만 몸에 엉겨 붙고 건강은 절교하자고 보채는 현실을 맞았다. 건강식을 몹시 싫어하는 남편으로 인해 더욱 흑화 된 나의 주식은 밥보다는 라면, 치킨, 피자, 밀가루 음식이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여러 종류의 닭가슴살을 주문했다. 닭가슴살을 먹고 치킨을 끊었다는 사람도 있고, 다양한 맛의 닭가슴살 덕분에 골라 먹는 재미까지 있다는 후문에 한껏 기대가 됐다.

본래 치킨을 먹을 때도 닭다리보다는 닭가슴살을 선호하는 나에 비해 한껏 경계태세를 취하는 남편이 걱정이었다. 종일 업무에 시달리고 온 그에게 조촐한 다이어트 식품을 내밀 수는 없는 노릇. 그런데 한껏 거나한 식사를 즐긴 후에 갑자기 닭가슴살을 시식해 보겠다 나서는 그였다. 양념치킨 소스가 흠뻑 묻은 닭가슴살을 간식으로?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후다닥 닭가슴살을 대령해 보았다. 배가 몹시 부른 상태로 닭가슴살을 맛본 남편은 고무 씹는 것 같아, 맛없어, 별론데? 하며 악평을 쏟았다. 무염의 닭가슴살을 주식으로 먹는 사람들도 많건만 첫 시식에 고무 씹는 것 같다니.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며 기름에 튀긴 양념치킨과 비교하면 안 된다고 그를 설득했다. 이미 냉장고 한 칸을 차지한 닭가슴살이 싫다고 해도 도망갈 구멍이 없단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닭가슴살을 먹으니 그렇게 좋아하던 치킨이 전혀 당기지 않았다. 닭갈비, 찜닭 등도 멀리 하게 되어 여러 모로 이득이었다. 모든 닭 요리는 닭가슴살 한 팩으로 충분했다. 평소 고지방, 코칼로리의 음식을 고수했던 우리에게 닭가슴살의 효과는 빠르고 확실했다. 요 며칠 닭가슴살을 저녁 식사로 갈음한 남편은 산책하는 내내 속이 더부룩하지 않고 편안하다고 노래를 불렀다. 금세 배가 고파지는 현상도 없어 군것질 없이 숙면을 취하는 날도 늘었다. 오히려 나보다 더 식단을 선호하는 남편의 반응이 반갑고 놀라웠다. “점심 뭐 먹었어? 저녁 메뉴는 뭘로 할까?”라고 묻자 아직 근무 중이던 그가 “닭가슴살”이라는 놀라운 네 글자를 보내왔다. 평소라면 점심 메뉴와 겹치지 않는 맛난 저녁 식사를 위해 열띤 토론을 벌였을 우리였다.


닭가슴살에 엄마가 텃밭에서 따다 주신 신선한 채소를 곁들여 먹고 빠르게 산책을 나온 우리 부부. 저녁 시간이 많이 남아서 기분까지 행복한 저녁이었다. 남편은 딱 사흘 만에 몸무게 감량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그는 맛보단 눈에 띄는 체중 변화로 인해 닭가슴살을 먹는 재미에 빠졌다.

닭가슴살 소시지, 양념치킨 맛, 짜장 맛, 떡볶이 맛, 데리야끼 맛 등. 별별 다양한 닭가슴살 덕분에 의외로 수월한 식단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남편 몰래 군것질도 종종 했지만 꾸준히 건강 식단에 동참할 요량이다.


채소를 많이 먹을수록 가당 제품과 탄수화물이 덜 당기는 경험은 실로 놀라웠다. 식전에 채소를 먹으면 살이 덜 찐다는 말은 여러모로 참이었다. 닭가슴살 한 조각에 채소 여러 장을 겹겹이 싸서 오물오물 씹으면 포만감이 가득하다. 푸릇한 향과 신선한 식감에 집중하며 건강한 식습관을 기르고 싶단 바람을 천한다. 온통 자극적인 것들에 물든 입맛은 오늘은 닭가슴살, 내일은 라면을 달라 주장한다. 나쁜 음식을 먹으면서 건강하길 바라고, 살찌는 음식을 먹으면서 날씬하길 바라는 마음을 이젠 몸에서 영영 분리하고 싶다. 중증 탄수화물 중독자인 내게 채소가 구원의 녹색 키가 돼주면 좋겠다.


가까스로 채소를 먹기 시작한 요즘 병으로 가족을 잃은 분의 절절한 조언이 생각났다. 친구의 아버지께서는 아무런 양념도 하지 않은 채소를 오래 씹는 습관을 들이라고 하셨다. 내키지 않더라도 다양한 채소를 먹으며 쓴맛, 신맛, 쌉싸름한 맛, 떫은맛 등 여러 맛을 느끼고 미각을 회복해야 한다 말씀하셨다. 먹는 걸 함부로 여기지 말고 자극적인 음식보단 건강한 음식을 가까이하라고 사정하시듯 강권하시는 아버님이셨다.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 어린 조언에 감사를 느꼈다. 비록 지금은 닭가슴살의 양념에 의존하며 단백질을 섭취하고 있지만 잃어버린 미각을 찾는 노력을 이어나간다. 일부러라도 채소를 입안에 구겨 넣고 양념치킨 대신 닭가슴살을 먹으며 내 몸에 푸릇푸릇한 대화를 건넨다. 오늘 내가 먹은 것이 내일 나의 건강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아삭아삭 채소의 응원을 입과 귀로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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