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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세스쏭작가 Jan 02. 2024

말 잘 통하는 푸들입니다

한국어 능력 우수견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을 증명할 수 있게 됐다. 식구들은 나를 가르치는 데 하나같이 열성적이었다. 우리는 사람의 언어와 개의 언어를 서로에게 알려 주기 위해 갖은 방법을 총동원하며 집중학습을 반복했다. 효과는 기대이상이었다. 그런데 정작 내가 적응하기 힘들었던 건 말이 아닌 무언의 표현 방식이었다. 반갑다고 달려오는 행위라든지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손을 번쩍 모양새를 이해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이러한 애정 표현에 지레 겁을 먹고 도망쳤던 적도 잦다. 은연중에 서린 좋지 않은 기억과 본능적으로 몸을 보호하고자 뒷걸음질 치는 나를 보고서 가족들이 개의 언어를 적극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는 만큼 더욱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은 참이다.


 집에서 얼굴 보기 힘들 정도로 바쁘게 지냈던 언니는 나를 막냇동생으로 맞은 후로 집순이를 자처했다. 큰언니는 가족들 몰래 맛있는 간식을 숨겨 와서 나를 만족시켰다. 소고기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애정하는 간식이다. 소고기 한 점을 얻어먹기 위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사람의 말은 대거 습득했다. 소고기는 곧 나의 위대한 쓰앵님이다. 가족들이 무슨 말을 할 때면 고개를 왼쪽 오른쪽으로 갸우뚱하며 귀를 기울여 듣는 습관이 있는 나. 그런 내 모습을 보고 귀엽다고 웃음을 터뜨리는 가족들에게 난 무척 진지하다고 왕왕 항의했다.

 언니 방에서 비밀리에 간식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던 늦은 오후였다. 퇴근한 언니는 지친 기색도 없이 하루 동안 있었던 일과 나와 함께 할 주말 계획까지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눈을 크게 뜨고 최선을 다해 듣기 수업에 했다. "붕붕이를 타고, 유니 오빠랑, 맘마, 친구, 언니랑..." 대강 아주 신나는 일이 계획돼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언니의 말이 한 시간가량 지속 되자 슬슬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하품을 여러 차례 하며 언니에게 눈치를 줬지만 소용없었다. 게다가 간식도 모두 동이 난 상황이었다. 그때 아빠가 방문을 열고 물으셨다. "큰딸. 너 누구랑 그렇게 계속 통화를 하냐?" 푸들 막냇동생과 대화하는 소리였다는 걸 아신 아빠가 박장대소하시며 말씀하셨다. "자두가 말귀를 잘 알아듣는 이유가 있었네." 그럼요. 아빠. 사람과 세상에서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강아지 바로 저 자두입니다.


 가족들과 궁둥이를 맞대고 지낸 지 7년 차. 서당 개 칠 년이면 이렇게 글도 쓴다. 내가 알아듣는 단어들이 너무나 방대해지자 나 빼고 몰래 외출할 일이 있으면 단어를 바꿔치기하거나, 소곤소곤 속삭이거나, 짧은 영어를 사용하기도 하는 그들 덕에 내 촉은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있다. 이제는 옷을 차려입고 화장대에 앉은 언니를 보면 애당초 문턱에서 나를 밟고 지나가라고 항하거나, 가족들이 대문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신발장에 미리 가서 배를 깔고 눕는다.

 식구들이 나와 늘 함께할 순 없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을 다잡고 노력해도 그들과 떨어지는 게 매일 처음처럼 통렬히 슬프다. 나의 하루는 인간의 닷새와 같다. 가족들과 나는 말도 마음도 잘 통하지만 주어진 시간의 길이는 서로 많이 다르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붙어 있고 싶어서 그들의 언어를 배웠고 삶의 패턴도 일일이 익혔다. 하지만 홀로인 시간을 즐기는 것만큼은 마지막 눈 감는 순간까지 해낼 수 없을 것 같다. 오늘도 가족들과 도란도란 대화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가 귀찮은 소리가 들리면 못 알아듣는 척 명연기를 선보인다.


가져와.

망!?

 

이제 소고기 없어.

망망!?

 

잠깐만 나갔다 올게.

망망망망망!!


 나의 행복은 언제나 단순하다. 가족들과 붙어 지내는 시간이 많은 날은 성은이 망극한 날. 집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날은 더 망할 것도 없는 날. 내게 사랑의 언어란 언제나 '시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주시면 좋겠다. 그 어떤 맛있는 간식보다도 함께하는 시간이 내게 포만감을 준다. 그 어떤 좋은 선물보다도 함께하는 시간이 더 큰 즐거움을 준다. 나는 애초에 이렇게 지어진 녀석이다.

내 이름은 자두, 푸들이, 공주, 딸, 예쁜이, 똥개, 쪼꼬미, 귀요미... 또 뭐가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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