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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세스쏭작가 Feb 06. 2024

푸들의 불완전 범죄

푸들은 빵 봉투를 찢어


 가족을 기다리는 적막한 시간.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아무도 없는 거실과 방 곳곳을 어슬렁어슬렁 배회했다. 이따금 엘리베이터 소리가 들리면 부리나케 신발장으로 달려갔다. 귀를 쫑긋 기울였다. ‘분명 엄마 목소리가 들렸는데?’ 나 여기 있다고 빨리 문 좀 열어 보라며 앞발로 대문을 빠르게 긁었다. 돌아오는 건 적막함과 두 배의 실망이었다. 기다림에 지친 나는 거실 소파 위로 올라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 거실과 주방에 놓인 흰색, 분홍색 쓰레기통이 눈에 번쩍 띄었다. 내 키보다 큰 쓰레기통에 다가가 킁킁 냄새를 맡아보니 달콤한 빵 봉투 향이 났다. 오늘 누울 곳은 여기다. 나는 옆차기 공격으로 대번에 흰색 쓰레기통을 자빠트렸다. 빵 봉투에 남은 부스러기와 크림을 먹어 보니 사료보다 스무 배는 맛있었다. 가족들의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영수증을 갈기갈기 찢는 작업도 잊지 않았다. 와우. 내가 심심할까 봐 이런 놀이를 준비해 주셨다니. 역시 우리 가족들이 최고다. 주방에 있는 분홍색 쓰레기통에선 쿠키 부스러기와 소고기 냄새가 잔뜩 묻은 키친타월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언니가 왔다. “언니. 내가 얼마나 기다렸게. 멍멍.” 빛의 속도로 달려가 언니를 맞았다. 흥분을 가라앉히라며 가만히 내 등을 쓰다듬던 언니는 해부된 쓰레기통 두 개를 발견하더니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자두야. 왜 쓰레기통을! 아니다. 다 내 잘못이다.” 언니는 쓰레기통을 바로 세운 후 내가 전시해 놓은 놀잇감을 하나씩 다시 주워 담았다. 언니와 쓰레기통 주변을 돌며 신나게 꼬리를 흔들어댔다. 그 후 홀로 있을 때면 가장 먼저 쓰레기통의 위치를 파악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런데 가족들이 최고의 장난감인 쓰레기통을 가구 위에 올려놓고 가는 경우가 잦아졌다. 아무리 바빠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그래도 이따금 단단히 봉인된 바게트나 과자봉지를 찾아냈고 신나게 노즈워킹을 했다. 일용한 간식에 고마움을 느끼며 가루 한 톨까지 싹싹 먹어치운 후 단잠에 빠졌다. 조청 유과라는 달콤한 스낵과 연유 크림 바게트의 맛이 특히 일품이었다. 귀가한 언니는 빈 봉투 앞에 무릎을 꿇고 감동에 젖은 모습을 보였다. “헉! 도대체 이걸 어디서 찾았지?” 우쭐한 나는 부쩍 커진 배통을 자랑하며 별것도 아니라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요즘 들어 보물찾기 놀이에 번번이 고배를 마시는 중이다. 빈집에 머무는 내게 그나마 위로를 주는 건 흥미로운 냄새가 나는 휴지통과 자극적인 간식이다. 왜 호랑이 인형 따위로 나의 외로움을 달래려 드는지 모르겠다.

 이따금 난장판이 된 쓰레기통을 보고 “이걸 두고 간 내 잘못이다.”라고 외치는 언니를 보면 한글을 다시 배워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것만 두고 간 내 잘못이다’로 바꿔 말해야 비로소 옳은 문장이다. 강아지에게 쓰레기가 가득 담긴 휴지통은 강력한 중독성과 넘치는 재미를 제공한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그 맛을 모르게 하던지, 매번 내 손이 닿는 위치에 제대로 비치하던지 둘 중 한 가지만 했으면 좋겠다. 빈집에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신세를 자처하는 꼴은 영 취미가 없다.

신문: 읽지 말고 찢으세요 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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