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세 시. 모처럼 남편이 외출하고 나 홀로 집에 머무는 주말. ‘독서를 통해 마음을 가다듬고 글도 써야지.’ 알찬 계획을 세웠다. 책을 읽는 동안에 세탁기를 돌리는 것이 좋겠다 싶어 룰루랄라 세탁실로 갔더니 건조기 안에 마른 옷가지들이 나를 노려 보았다. 우리 부부의 옷을 구출한 후 건조기 먼지망을 비우고, 청소기를 잡은 김에 집안 곳곳의 먼지도 빨아들였다. “윙윙.” 청소기 모터도 나의 시간도 빠르게 돌아갔다. 대체 어디서 굴러드는지 모를 먼지와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가구와 바닥의 먼지를 닦고 걸레를 빠는 반복 작업을 하고 나니 손목도 허리도 우지끈 근육통이 왔다.
벌써 일곱 시가 돼버린 토요일 저녁. 남편이 귀가했다. “쉬어야지. 왜 그렇게 바빴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 뜨악.뭐시라고라?
이것만 하고 진짜 내 시간을 가져야지 애만 닳다가 주말 오후 시간을 다 써버리고 체력이 방전돼 두 손이 덜덜 떨렸다. 뭐라도 먹어야겠는데 얼른 생각나는 게 없어 엄마가 챙겨주신 샤인머스캣 두 송이를 빠르게 씻어냈다. 알알이 뜯어낸 샤인머스캣과 얼음 그리고 꿀을 함께 넣고 갈았다. 믹서기 뚜껑을 열고 컵으로 따라내는데 하얀 거품 층이 ‘사락사락’ 소리를 냈다. 거품이 채 꺼지기도 전에 싱크대에서 앞에서 주스를 마셔버렸다. 순식간에 비워진 유리컵을 재빨리 씻어내고 샤인머스캣 줄기를 일반 쓰레기로 분리한 후 드디어 책상에 앉았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싱크대 앞에서 허기를 채운 덕분에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단둘이 사는 집인데도 뭐 이리도 할 일이 많은지. 이럴 때면 항상 슈퍼우먼 같은 우리 엄마가 떠오른다. 벌겋게 언 손으로 찬 물 설거지를 하시며, 건조기도 로봇 청소기도 없이 온 방을 쓸고 닦으셨던 삼 남매의 엄마. 엄마는 맞벌이 주부로 살면서 맛있는 생과일주스까지 디저트로 챙겨주셨다. 그리고 본인은 남은 주스를 싱크대 앞에서 호로록 마시고 빠른 손놀림으로 설거지를 마저 하셨다.
믹서기에 각얼음과 과일만 넣으면 휘리릭 만들 수 있는 것이 생과일주스이지만 남이 만들어 주는 주스와 내가 직접 갈아 마시는 주스는 수고로움이 천지 차이. 과일을 씻고 속살을 발라내는 작업, 과일의 성격에 따라 껍질을 일반 쓰레기와 음식 쓰레기로 분리하는 작업, 믹서기를 깨끗하게 세정하는 작업까지 해야 주스 한 잔이 나온다는 사실을 결혼하고 나서야 제대로 깨달았다. 스무 해가 넘도록 엄마가 해주신 생과일주스를 벌컥 들이켠 후에 컵은 싱크대에 담그면 그만이었는데 그립고 송구한 시절이여.
남편은 내가 집안일을 하고 있으면 항상 성큼 다가와서 "내가 할 테니까 쉬어." 하고 멋진 목소리로 말을 건다. 그리고 내가 하던 일만 딱! 딱 그것만 해놓는다. 허허.
"여보. 쓰레기는 왜 그대로 뒀어?" 물어보면 남편은 '안 보여서 못 봤다'라는 답을 한다. 마치 시적 표현 같기도 한 구슬픈 이중부정의 문장... 그에게 집안일을 맡길 때마다 듣게 되는 그 말. 나는 안 보여서 보지 못했노라.
어째서 내 눈에는 대문짝만 하게 보이는 것들이 그에게는 정녕 존재감조차 드러내지 못한단 말인가. 나의 단점 역시 당최 들여다보지 않는 남편이기에 딱히 할 말이 없다만.
"여보. 주말에는 안경알을 새것으로 바꿔봅시다. 혹시 압니까. 안 보여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조금씩 보게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