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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세스쏭작가 Apr 30. 2024

펜심(Pen心)을 품고 산다

정가: 4만 7천 원, 감정가: 74만 원

 펜을 사랑한다. 과거에도 지금도 무구점에 가면 펜 구경만큼은 놓치지 않는다. 수 백 자루의 펜을 가진 자라 어느 순간부터는 예쁜 펜을 봐도 입맛만 다시 중이다만. 특히나 내가 가진 모든 펜들 중에서 여덟 자루의 필기구는 나의 펜 사랑을 대표하고도 남는다.


 낡을 대로 낡은 샤프 두 자루는 상품 표기와 프린팅이 모두 벗겨져 버렸다. 영 볼품없는 외관이지만 그럼에도 함부로 가지고 다니지도 못 할 정도로 아낀다. 여동생과 궁핍한 공시생 처지일 적에 가볍고 편한 샤프를 한 자루씩 샀었다. 동네 문구점에서 구매했는데 지금은 가게도 모두 사라졌다. 우리가 선택한 건 아주 평범한 천 원짜리 샤프였다. 구매 조건은 손목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아주 가벼울 것. 이 샤프로 두꺼운 연습장을 가득 채웠고 수 권의 수험서를 방랑했다.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먼저 합격생이 된 여동생은 자신이 쓰던 분홍색 샤프를 내게 선물로 줬다. "언니. 이거 합격 샤프다. 언니 가져." 뒤늦게 수험 시장에 뛰어들었던 나는 이 샤프와 함께 외로운 수험 생활을 보냈다. 훗날 이 합격 샤프는 나를 공시시험이 아닌 취업의 최종 관문을 뚫게 만들었다. 십 년도 더 된 샤프 두 자루에는 나의 고달픈 과거사가 빼곡히 담겨 있다. 여전히 '파워 워드'라는 영어 수험서를 들여다볼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내 손에 들리는 건, 물론 합격 샤프다. 두 자루의 샤프에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청년들의 꿈이 서려 있다. 녀석들만 손에 쥐면 여전히 공부가 잘 풀린다. 열정도 되살아 나고.


 샤프 이후로 얻은 여섯 자루의 펜이 품은 꿈은 한결같다. 이들 모두는 '작가지망 펜'이다. 멋진 작가가 되라는 응원을 담아 가족들이 선물한 펜 세 자루, 내가 서점에서 샀던 펜 세 자루. 총 여덟 자루의 펜은 특별한 연필꽂이에 따로 분리하여 보관 중이다. 책상에 앉을 때마다 '글 안 쓰냐?'라는 음성이 자동 지원 되는 대단한 펜이다. 펜 뒤통수를 꾹 누르고 텅 빈 백지에 손을 올리면 그새 행복감이 돈다. 하얀 종이에 까만 글씨가 더해질수록 기쁨의 양도 커진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자주 행하며 사는 것. 이 사실만으로도 영감은 가득 차고 나는 어떤 글이든 쓸 수 있는 창작자가 된다.


 다 해 봐야 오만 원도 되지 않는 필기구의 감정가를 74만 원으로 정한 이유를 설명해야겠다. 너무 과한가 순간 망설였지만 전혀!

 글을 쓰게 만듦과 동시에 추억과 영감까지 덤으로 불러일으키는 요물인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따금 이들 중 하나 혹은 앞서 소개된 보라색 도끼빗이 보이면 동공에 지진이 발발한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책상 위 수첩에 끼워진 볼펜을 그냥 지나치고 봤던 연필꽂이를 보고 또 보고, 뒤졌던 가방을 뒤지고 또 뒤지고. 그러다가 '아. 뭐야. 여기 있었구나.' 하고 발견할 때면 허무한 한숨과 기쁨의 미소가 만개한다.


 특별한 애장품은 주인을 설레게 한다. 세상에 온갖 반짝이고 좋은 것들이 새로 나와도 갈음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닌 나만의 물건들에는 그만한 힘이 있다.

 특정 장소로, 오래전에 품었던 꿈으로, 잊고 싶지 않은 추억으로 나를 데려가는 타임 슬립 기능이 탑재된 녀석들을 어찌 아끼지 않을 수 있을까. 온 천지에 널리고 널린 볼펜이지만 겸연쩍게 의미부여 좀 해 봤다. 비싸지 않아도 큰 가치를 가진 당신만의 애장품은 무엇일지 궁금하다.

미세스쏭작가의 소박한 애장품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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