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세스쏭작가 May 21. 2024

모자가 주인을 선택한다

정가: 35,000원, 감정가: 20,000원

 예쁜 볼캡을 보면 발걸음을 쉬이 못 뗀다. 새 모자를 향한 구매욕을 억누르는 방법은 간단하다. 가능하다면 한 번 착용해 보기. 대부분의 모자가 사람을 아주 많이 가린다는 사실을 아니, 나를 선택하기를 꺼린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 색깔은 물론 로고의 크기, 챙의 넓이, 소재의 강도까지 모두 잘 어울려야 얼굴과 모자가 따로 놀지 않는 법. 이런 이유로 보기엔 예뻐도 도통 손이 가지 않는 모자가 있고, 별로인 모양새인데 닳도록 손이 가는 모자가 있다. 애견 산책용으로 구매한 나이키 볼캡이 그 예다. 아무런 감흥 없이 샀던 나이키 볼캡은 어째 모양새부터가 흐물흐물 힘이 없었다. 게다가 누군가가 열심히 쓰다가 물려준 것 같은 빈티지스러운 느낌이었다. 그런데 많은 모자를 물리치고서 최고로 잘 산 아이템이 되었다. 한가운데 하얀 실로 NIKE라는 작은 글자와 로고가 수 놓인 이 모자는 거의 모든 옷차림에 무난하게 어울린다. 같은 모자를 가족들에게도 선물했는데 모두 어찌나 잘 쓰고 다니는지 빈티지를 넘어 빈티가 되었다는 후문.


 '내겐 흐물흐물한 소재의 모자가 어울리나 보다.' 이거다 싶어 똑같은 형태에 다른 브랜드의 모자를 주문했다. 그런데 어라? 또 또 모자가 낯을 가리는 게 아닌가. 내겐 흰, 검, 베이지, 파랑, 보라, 노랑 등등의 여러 모자가 있다. 그중에서도 나이키 볼캡 하나가 모든 모자를 합쳐도 이길 만큼 쓰임이 좋다. 다른 모자들의 품질이 훨씬 우수하고 가격이 높은데도 말이다.


 모자는 신발만큼이나 사람의 모양새를 깐깐하게 따져 묻는 물건이다. 이를 간과하면 방치되는 아이템들이 점점 늘기 마련. 옷은 많은데 막상 외출하려면 입을 옷이 없다는 말은 모자에도 적확히 해당된다. 가진 모자는 많은데 내게 찰떡인 모자는 극소수이다. 이미 너무 많은 모자를 소유한 탓에 구미가 당기는 모자를 발견하면 애써 '신 포도' 논리를 펼친다. 내 얼굴이 갸름한 달걀형이 아니 동그란 달덩이라서 다행이다. 예쁜 모자도 신 포도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아무 모자나 잘 어울렸다면 텅장 신세는 물론 방 한편이 모자로 가득 찼을 것이다.


  어울리지도 않는 아이템들에 눈독 들이지 말고 있는 물건 잘 사용하기. 반짝하고 마는 유행 따라가느라 지구에 많은 쓰레기 남기지 않기. 빈티지가 빈티로 변해도 청결하게 관리하며 오래 사용하기. 여하튼 간에 모자는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선택받는 것이다. 방치된 몇몇 모자가 내게 가한 일침이다.

이전 07화 펜심(Pen心)을 품고 산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