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세스쏭작가 Jun 11. 2024

동심을 부르는 기차 연필깎이

정가: 20,000원, 감정가: 23,000원

 열 살 무렵의 크리스마스였을까. 가족들과 파파 레스토랑이라는 경양식집에서 오붓한 저녁을 즐겼다. 주황색 수제 소스 돈가스와 묵은지가 맛있는 레스토랑이었는데 그곳을 추억하면 군침이 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크리스마스트리 하나 없는 시골 도로가 유난히 적막해 보였다. 그토록 기다리던 성탄절이었건만 기대와 현실의 괴리가 컸다. 아쉬운 마음 허연 입김을 연신 내뿜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부모님을 따라 걷던 중에 아빠가 입을 여셨다. "뭐 필요한 거 있냐? 여기 들렀다가 갈래?" 아빠가 가리키신 곳은 유일하게 불이 켜져 있던 크로버 문구점이라는 곳이었다. 성탄절 이벤트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니 뛸 듯이 기뻤다.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우리 가족이 들어서자 주인아저씨가 서글서글한 미소로 반겨주셨다.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을 쟁취하고야 말겠다는 집념으로 문구점을 곳곳을 수색했다.


 "아빠. 나 이거." 배짱 두둑하게 크로버 문구점 내에서 거의 최고가에 달하는 학용품을 골랐다. 이름하여 하이샤파 기차 연필깎이. 맛있는 저녁을 먹고 비싼 선물까지 요구하는 것 같아 죄송했다. 아빠는 내가 고른 물건이 무엇인지 가격은 얼마인지 묻지도 않고 지갑부터 꺼내셨다. 손바닥보다 큰 상자에 담긴 기차 연필깎이를 들고 집에 돌아오는 길엔 온 세상이 축제였다. 내가 이래서 크리스마스를 좋아해!


  당시 기차 연필깎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고급 학용품에 속했다. 번쩍이는 은빛 광택을 보고 있노라면 부자 학생이 된 듯한 우쭐한 착각이 들었다. 뭉툭한 연필을 보면 뾰족하게 끝을 다듬고 싶어 안달이 났다. 연필을 깎기 위해 공부를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필을 깎을 땐 나만의 필수 비법처럼 전속력으로 손잡이를 돌렸다. 대단한 힘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그리 오버를 했는지 의문이다. 에메랄드 초록색 책상 위의 오른쪽 모퉁이는 기차 연필깎이의 전용 주차 구역이었다. 덕분에 긴긴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결혼하고 새로운 책상이 생겼다. 뭔가가 빠진 같아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맞다. 내 기차 연필깎이! 지금도 판매하고 있을까?' 초조한 마음으로 검색창에 여섯 글자를 쳤다. '기차 연필깎이' 딸깍 쇼핑 탭을 누르니 판매처가 주르르 나왔다. 다행스럽게도 손쉽게 구입이 가능했다. 어린 시절의 설렘이 기차 연필깎이를 타고 함께 배송 됐다.


 부모님께서 공부하라고 엄포를 내리면 책상에 앉아 일단 연필부터 깎았던 꼬맹이는 딱 그대로 자라났다. 지금도 책상에 앉으면 심이 닳은 연필부터 사냥하고 보는 나. 크리스마스가 되면 옛날 돈가스와 은색 연필깎이가 떠오르는 나. 서걱서걱 나무 깎이는 소리를 들으며 "공부해라. 숙제해라." 하시던 부모님의 젊은 목소리를 추억한다. 손잡이를 돌릴 때마다 애틋한 기억이 피어오르는 수동 연필깎이가 있어 공부할 맛이 난다. 글 쓸 맛도 난다.

이전 09화 여름을 알리는 팔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