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SP의 숨통 트이는 직장생활
십인분 인생 나가신다 6
출퇴근 왕복 세 시간. 인파에 떠밀려 지하철 환승을 하고 다시 걷다 보면 도착할 수 있는 회사. 심히 만차 상태인 2호선은 언제나 내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매너손을 한 남성들과 지친 직장인들 사이에서 마치 공중부양을 하듯 껴있는 내 모습은 우습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다. 무사히 출근하면 진짜 전쟁이 시작됐는데 이미 지옥철에서 장렬히 전사해 버린 나는 아침부터 녹초가 되어 업무에 임했다. 어떤 날은 내가 어떻게 출근했는지 전혀 기억조차 안 나는 상태로 회사에 와있기도 했다. 퇴근 후 사교모임과 절대적 야근을 강요하는 사내 문화는 마지막 남은 저질 체력마저 앗아갔다.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선 지하철 안에서 누군가 나를 스치면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원치 않는 소음을 이겨내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음악 한 곡을 반복해서 듣는 것이었다. 촉각, 청각, 후각 모든 감각이 유독 발달해 있는 나로서는 출퇴근 자체가 고행길이었다. 다들 이렇게 사는데 유난 떨지 말라고 나를 다그치며 남들과 똑같이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쳤다. 주말이 되면 열심히 번 돈 한 푼 쓰지 못하고 우울감과 피로에 찌들어 종일 집에만 누워 있는 날도 많았다. 몸이 너무 피곤하니 마음도 찌뿌둥하고 월요일이 오는 게 두려웠다. 직장에서는 밝고 재미있는 사람으로 통하는 나였지만 퇴근 즉시 에너지가 고갈돼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뒤늦게 심리 도서를 통해 내가 다섯 명 중 한 명으로 존재하는 HSP(Highly Sensitive Person)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매우 예민한 사람인 HSP의 기질은 타고나는 것이며 유전자에 의에 결정이 된다고 한다. 자극에 지나치게 민감하며 쉽게 지치고 놀라는 사람인 내가 늘 무던한 척 연기하며 살았으니 인생이 재밌었을 리가 있나.
개인적인 성향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 심신의 상태,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 남들 눈치를 많이 보는 습성, 장시간 출퇴근으로 인해 큰 피로를 느꼈던 것 모두 HSP와 상관관계가 있었다. 어리석은 나는 HSP의 개념 자체를 몰랐고 스스로 나가떨어질 때까지, 더는 힘을 낼 수 없을 때까지 항시 아등바등 살았다. 무한 경쟁 시스템 내에서 나를 경계하는 이들의 악담과 텃세, 만원인 대중교통 안에서 고통스러웠던 시간, 일도 잘하고 사람에게도 잘 보이려고 무던히 애쓰는 날들을 보내면서 나다움을 잃어버렸고 나를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직장 생활 자체를 안 하면서 살고 싶었고 나는 직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어려운 업무를 해내고 좋은 평가를 받아도 일을 통해 최종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공허함과 의심이었다.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나. 이런 게 과연 내가 원하던 삶인가.
오히려 이 모든 고민과 문제를 해결해 준 직장이 바로 ‘유기계약 행정직’이었다. 계약직 행정의 채용 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넣었다. 최초로 집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회사였고 행정 일이 나와 잘 맞을 것 같아서 면접을 봤는데 덜컥 붙었다. 경쟁자 중에서 나 혼자만 행정 경험이 없었지만 내가 누군가! 면접의 달인 아닌가. 즉흥적이고 저돌적인 나의 도전이 이번엔 꽤 성공적이었다.
오랜 시간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아도 되는 근거리의 직장, 시작과 끝이 명확한 행정일, 서로 밟고 올라서야 할 필요가 없는 유기 계약직. 그 모든 조건이 직장생활을 원치 않는 나에게 최선의 차선책이 돼주었다. HSP인 나로서는 진즉에 가까운 직장을 찾아보고 조금이라도 마음 편하게 다닐 수 있는 환경을 선택했어야 했다. 그동안 심신을 혹사하며 남들처럼, 남들만큼을 중요시했던 내가 퍽 애석하게 느껴졌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나가누마 무츠오’가 알려준 셀프케어 매뉴얼을 보고 깊이 탄식했음은 물론이다.
-도망쳐도 괜찮다는 것을 전제로 일에 부딪쳐본다.
-일보다 자신을 지키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어떤 직장에서 일하는 게 이상적인지 미리 파악한다.
내가 나를 몰라줄 때 그는 벌써 오래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 OMG!
HSP 미세스쏭작가의 필수품: 이어 플러그, 노이즈캔슬링 이어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