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라는 마스다미리의 저서를 보고 마음이 크게 동했던 적이 있습니다. 좋은 사람과 교제하던 때였지만 '결혼할 수 있을까?'라는 수짱의 물음이 막막하게 느껴졌습니다. 착하고 다정한 남자친구 Y는 연애한 지 두 해가 흐르도록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입밖에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의 속마음이 궁금했지만 직접 묻지 못하고 이러저러 추측만 할 뿐이었죠. 그러던 중에 만난 삼십 대 솔로 수짱의 이야기가 어찌나 공감되고 반갑던지. 책을 읽으며 '결혼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언제쯤 결혼하게 될까?' 다양한 고민을 했습니다.
연애의 종착점이 어디든 간에 현실과 결혼의 괴리는 꽤나 컸습니다. 당시 우리 두 사람의 직장이 안정적이지 않았고 모아둔 돈도 없는 데다가 연애 중후반 무렵에는 고시생 신분이 되기도 했습니다. 수험 시장의 경쟁률은 나날이 하늘로 치솟았고 마음엔 여유가 없었습니다.
어느 겨울날 마트에서 음료를 사서 나오는데 뜬금없이 Y가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시험에서 떨어지면 마트에서 일을 해서라도 좋은 거 많이 사줄게." 그의 애정 표현이 귀여워서 저는 호탕하게 웃었습니다.
백화점 쇼윈도를 지날 때에도 그는 제게 비슷한 말을 건넸습니다.
"내가 나중에 돈 벌면 저런 좋은 가방 많이 사줄게." 좀처럼 그런 말을 않는 그였기에 고마워서 밝은 미소로 답했습니다. 덕분에 마음만은 어느 때보다도 따뜻한 겨울이었습니다. 그렇게 겨울이 가고 봄도 흘러갔습니다.
나중에 돈 벌면 뭐든 다 해주겠다던 Y가 데이트할 때 자꾸만 "돈 없어."라는 말을 하더군요. 데이트 비용을 두고 남자친구가 "돈, 돈" 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저는 장난 반, 진심 반으로 새침하게 웃으면서 "마음이 변한 거야? 돈이 아까워?"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절대 그런 게 아니라고 답했습니다만 이 부분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인터넷에 검색도 해 보고 책도 섭렵했는데 별별 다양한 의견들이 넘쳐났습니다. 마음이 없는 것이다, 헤어져라, 돈이 아까워지는 순간 연애는 끝난 것이다 등등. 극단적인 답변은 조바심을 일으킬 뿐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Y를 아는 남사친에게 위의 상항에 대해 털어놓았습니다.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던 지인이 제게 물었습니다.
"그날 데이트하면서 뭐 했어?"
"백화점에서 밥 먹고 영화 봤어."
"백화점에서 둘이서 밥 먹고 영화 보면 얼마야? 진짜로 돈이 없으니까 없다고 하는 거지. 그런 걸로 섭섭해하면 안 돼." 아차 싶었습니다. 남자의 마음은 남자가 잘 아는 걸까요. 남사친의 대답은 정말 큰 도움이 됐습니다. 궁핍한 호주머니의 사정을 알려야 했던 Y의 심정이 어땠을지 생각하니 아찔했습니다. 마트와 백화점에서 그가 스스로 다짐하듯 건넸던 말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웃으며 넘길 게 아니라 그저 너만 있으면 된다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해 줬어야 했는데. Y가 짊어진 마음의 짐이 어렴풋이 이해 됐습니다. 그럼에도 가끔은 우리의 미래를 그리는 이야기를 충분히 나누고 싶었습니다.
연애 삼 년 차, 여전히 결혼 이야기를 하지 않던 Y에게 "왜 결혼 이야기를 안 해? 나랑 결혼할 생각이 없는 거야?"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간결하게 "상황이 되면 해야지."라고 답했습니다. 매우 객관적이고 군더더기 없는 그의 대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결혼 생각 없으면 나 빨리 놔줘. 다른 사람 찾게." 이번엔 진심이 팔 할이었습니다. 적극적으로 속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Y에게서 회의를 느꼈습니다. "나도 결혼하고 싶지. 결혼할 수 있는 상황이 안 되니까 그렇지." 그의 발언 더는 반기를 들지 않았습니다. 현실판 수짱으로 전락한 저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모든 것에 여유가 넘치는 듯 행동하려 애를 썼습니다.
'오래 연애만 하다가 혼기를 놓치면 어떡하지.' 가끔은 이런 걱정도 됐지만 후회 없이 Y를 믿고 응원하고 싶었습니다. 언변술이 화려하지 못해서 그렇지 그의 행동과 눈빛에서 따스한 미래와 답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시험에 합격한 Y는 전보다 더욱 든든한 남자친구가 돼주었습니다. 그리고 딱히 진지하게 결혼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고서 우린 물 흐르듯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내 마음이 네 마음, 네 마음이 내 마음이었기에 가능했던 과정이었습니다.
서른 전에는 결혼하고 싶단 생각을 했는데 서른한 살에 웨딩드레스를 입었습니다.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고 기독교 예배 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면서 한 가지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장 9절-.
연애를 잘하다가도 결혼 이야기만 하면 삐걱대는 커플들이 있습니다. 한쪽만 결혼 의지가 있고 다른 한쪽은 결혼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는 경우 너무 늦지 않게 결단을 내는 게 좋다고 봅니다.
지인 커플의 이야기입니다. 여자는 결혼 의지가 99%, 남자는 1에 불과했습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생각했던 여자는 남자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나는 결혼 생각하면서 너를 만나고 있는데 넌 그게 아니라면 더는 아닌 것 같아." 각성한 남자는 여자를 놓칠 수 없다며 자신이 변하겠다 약속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커플보다 먼저 결혼식을 올렸고 우린 손뼉 치며 아름다운 신랑 신부를 축복했습니다.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결혼 이야기를 피하기만 하면 오해가 생깁니다. 과거에 수험생이었던 Y에게 듣고 싶었던 말은 "너랑 꼭 결혼하고 싶어.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였지 "상황이 되면 해야지."라는 발언이 아니었습니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 앞에선 어깨 펴고 당당하게 사랑을 표현합시다. 이건 시험 점수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돈 드는 것도 아니잖아요.
관계가 어색해질까 봐, 자존심 문제로, 나와 생각이 다를까 두려워서 결혼 이야기를 함구하는 중이라면 너무 늦지 않게 용기를 내야 합니다. 서로 같은 마음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나중을 계획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조율하는 일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중요합니다. 결혼을 하고 안 하고는 개개인의 결정이지만 혼기라는 놈은 말입니다. 뒤통수에 머리카락이 없다는 기회의 여신과 제법 형태가 닮았습니다. 혼기를 놓치면 연애의 기회를 잡기도 쉽지 않은 데다가, 기회의 여신과 헤어스타일이 비슷한 이성이 자꾸만 다가오고, 그러면 또 지나간 시간들에 연연하게 되고...그러기 전에 우리 사랑만큼은 청춘답게 적극적으로 쟁취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