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후예가 아닌 무전기의 노예
십인분 인생 나가신다 10
백화점 내부에 있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던 날이었다. 머리를 감겨주는 어린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녀의 말이 계속 한 박자씩 늦었다. 두 눈이 가려진 상태였지만 대강 파악이 되어 “무전기 때문에 일하기 힘들죠?”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거품을 내던 손을 멈추더니 반가운 목소리로 어떻게 아느냐고 되물었다. “손님과 말하랴. 일하면서 무전기 지시사항 들으랴 얼마나 정신없을지 안 봐도 빤해요. 저도 무전기 차고 일해 봐서 잘 알아요.” 내 말에 ‘맞아요’를 연신 외치던 그녀는 자신의 고충을 헤아려주는 손님을 만나 반갑다고 했다.
청소년 수련 시설에 입사한 날 생각지도 못한 물건을 하나 받았다. 원치 않은 입사 선물은 바로 문맹을 거스르는 크기와 무게를 자랑하는 까만 무전기였다.
“항상 소지하고 다니시고요. 본인 무전기는 본인이 잘 챙기세요. 절대 귀에서 빼지 마세요.”
하아. HSP와 무전기라니 최악의 조합이었다.
벽돌 같은 무전기를 늘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지직대는 신호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흡사 로봇이 된 기분이 들었다. 무거운 기계와 거추장스러운 선들로 인해 호주머니는 물론 심정까지 복잡하게 뒤엉켰다. HSP(Highly Sensitive Person)인 나에게 무전기는 수갑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식사할 때도 무전기를 껴야 했는데 음식 씹는 소리, 주변의 소음, 신호음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지시사항까지 쏟아져 소화기관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귀가 예민한 사람이나 청력이 안 좋은 사람이나 무전기를 끼고 일하는 것이 곤혹스럽긴 매한가지일 것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기계 자체의 무게와 시끄러운 기계음에는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핸드폰보다 더 즉각적으로 지시를 전달할 수 있는 무전기는 아랫사람들의 직장 생활을 한층 옥죄고 긴장하게 만드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주변 소음들로 인한 소통의 오류도 빈번했다. 모두가 날카롭게 반응하는 상황에 padon me?를 외칠 수 없어서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도 많았다. 나는 소머즈 같은 귀를 가졌기 때문에 옆 사람이 “방금 뭐라고 했어요?" 하고 물을 때마다 정확하게 재방송을 해주었다. 그만큼 신경이 풀로 가동되고 있었음이다.
청소년들이 단체로 1박 2일 수련을 오면 나는 권총 대신 무전기를 차고 전쟁터로 나갔다. “지지직. 다음 장소로 이동합니다.” 전달 사안에 즉각 “알겠습니다. 확인했습니다.”라고 답하지 않으면 수십 명이 귀를 쫑긋하고 있는 상황에서 야단을 맞아야 했다. 그런 내게 생각지도 못한 귀여운 반응을 보이는 학생들이 있었으니...
“꺄악. 쌤. 너무 멋져요. 금방 태양의 후예 유시진 대위 같았어요. 저도 열심히 공부해서 선생님처럼 될래요.” 뭣이? 나처럼 되겠다니 큰일 날 소리.
“너희는 훨씬 훌륭하고 좋은 직장에 가서 대접받고 살아. 꼭!” 내가 눌리지 않은 무전기를 확인한 후 종종 이런 당부를 하면 “왜요? 선생님?” 호기심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미래의 꿈단지들. 의미심장한 미소로 화답하는 내게 그들은 많은 관심과 애정을 보내 주었다. 그들 덕분에 타지 생활을 견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을 보냈던 나였기에 청소년들의 마음을 잘 헤아릴 수 있었다. 고작 1박 2일 부대끼고 헤어져야 하는 인연이었지만 함께 지내는 동안 그들은 나의 동료이자 친구였다. 청소년들은 사랑이 있는 가르침과 사랑이 없는 조언을 바로 구분했다. 때문에 사랑으로 똘똘 무장한 채 그들을 대했다. 그들은 기막히게 내 진심을 알아줬다. 청소년 수련 시설에서 청소년 지도자로 일하는 동안만큼은 꽤나 큰 인기를 누렸는데 퇴소한 후에도 내 SNS를 수소문하여 찾아오는 학생들이 많았다. 학생들과 개인적인 연락을 주고받는 건 금기사항인지라 애써 외면할 때가 많았지만 그들 덕분에 괴로운 무전기도 선임의 압박도 이겨냈다. 사랑의 능력에 대해 제대로 가르쳐 준 학생들이 오히려 나의 스승이었다.
수갑 같은 무전기를 벗어던지던 날 다소 특수했던 청소년 지도자의 직장 수기를 나는 이렇게 정의 내렸다. “사랑이 곧 능력이다.” 마음의 교신을 잘하는 청소년들의 주파수는 오로지 사랑에 맞춰져 있었다. 지도자의 똑똑함과 영리함의 정도보다 사랑에 명민하게 반응했던 청소년들을 통해 사랑은 절실한 능력임을 배웠다. 태양의 후예가 아니라 무전기의 노예로 살았지만 그때를 추억하면 가만히 미소 짓게 된다.
사람들 간 관계가 삐걱댈 때마다 가장 먼저 마음의 주파수를 확인한다. 제대로 사랑하며 살고 있는지 내 태도를 점검하면 대다수 문제의 원인이 보인다. 하늘이 유독 파란 날이면 그들이 두둥실 떠오른다. 푸른 여름날 만났던 나의 어린 선생님들은 어떤 모습의 어른이 되었을까? 기도와 응원을 부드러운 바람에 실어 보내는 청명한 날이다.
치지직. 원투원투. 나의 응원 소리가 들린다면 응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