귓구멍이 간질간질 심장이 팔딱팔딱
평소보다 삼십 분 이상 퇴근이 늦어져서 마음이 조급했다. 필라테스 수업을 예약해 둔 터라 서둘러 버스를 타야 했다. 텀블러를 재빨리 씻어서 책상 위에 엎어 놓고 컴퓨터 파일을 정리한 후 사무실에서 나왔다. 핸드폰 잘 챙겼나? 혹시 몰라 가방을 확인하던 찰나 크고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적막을 깨고 날아들었다.
"그래도 공문 쓰고 임용하는 건 지가 하는 것 같던데?"
설마 이거 내 이야기? 순간 피가 식는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놈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 보려 했다. 아주 잠깐 망설이다가 말았다. 열심히 일하고 떠나는 퇴근길이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버스는 덜컹덜컹 마음을 벌렁벌렁.
참나. 기분 엄청 더럽네.
아니야. 확대 해석 하지 말자. 다른 사람 이야기라고 생각하자.
공문 쓰고 임용하는 건 이 회사에서 나만 하는 건데? 게다가 목소리 큰 그놈이 내게 넘겼던 업무 아니던가. 빼도 박도 못하게 내 얘기가 맞았다. 생각할수록 기분이 더러웠다.
앞에선 '선생님'이라고 부르던 놈이 뒤에선 연장자인 나를 '걔' 혹은 '지'라고 지칭하고 있었다. "XX. 나이가 대수야? 나이가 벼슬이야?" 놈은 평소에 이런 말을 즐겨 사용했기에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마치 나이에 피해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워낙 성향이 독특하고 입도 거친 인물이었던지라 특히나 조심히 대해 왔는데 뭘 어떻게 해도 씹힐 운명이었나 보다. 놈과 나 사이엔 그렇다 할 사건이나 에피소드조차 없었다. 그런 나를 쥐어짜 가며 도마 위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썰어대고 있었다.
오십 분 필라테스를 하는 내내 운동에 전혀 집중이 되지 않았다. 길게 대화해 본 적도 없는 초면이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이 모여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까? 그런 이야기가 왜 나왔을까? 누가 먼저 시작했을까. 누구긴 누구야. 그놈이었겠지. 불쾌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심중을 어지럽혔다. 운동을 하면 마음이 좀 개운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안 하느니 만 못 한 상태로 집으로 돌아왔다. 배달 주문한 치킨과 남편을 기다리며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여보. 걔 있잖아. 욕 많이 하는 기회주의자. 그놈이 오늘 퇴근하는데 내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고."
"걔가 뭔 말을 해?"
"지가 나한테 넘겼던 업무 이야기 하면서. 내가 딱 그것만 한다는 식으로 사람들한테 지껄이던데? 나 너무 억울해."
"#$%@*! 진짜 독특한 놈이네. 계속 그렇게 살라고 해."
"계속 그렇게 살겠지. 그런데 나는? 숨죽이고 가만히 있어야 돼?"
"걔가 떠드는 것 말고 뭘 더 할 수 있는데? 자리만 뜨면 돌아가면서 남 욕하는 사람인 거 빤히 다 알았잖아. 몰랐어?" 하긴 뭐. 나만 욕먹는 것도 아니더구먼. 앞, 뒤, 옆, 사방팔방 선배들 욕하는 재미로 사는 망나니 같은 놈.
바삭한 치킨 한 입에 탄산이 가득한 콜라를 마시면서 남편과 이야기하다 보니 조금씩 기분이 풀렸다. 맛있는 치킨을 먹고 따뜻한 물을 받아 놓은 욕조 속에 몸을 담갔다. 뿌연 수증기 속에 오롯이 홀로 앉아 나쁜 기분을 흘려보냈다. 나의 소중한 일상을 더는 허비하지 말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빌런 네 놈이 나불거린다고 내 월급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여기 아니면 갈 곳이 없는 것도 아니고. 누가 뭐라 해도 나는 성실히 업무에 임하련다.
아직 부족한 점도 많고 맞춰 나가야 할 부분 또한 많겠지만 차츰 더 발전해 나가면 된다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예의바르돼 굽신거리지 않기. 모두와 잘 지내려고 하지 않기. 너무 잘하려고 육바하지 말 것. 나는 나다운 게 가장 편하니까.
다음날 아침. 자고 일어나니 거짓말처럼 마음이 치유되었다. 개운한 기분으로 씻고 출근 버스에 올랐다. 창밖의 겨울 아침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고작 그런 인간 때문에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았다니! 난 회복탄력성 좋은 개복치올시다.
그로부터 며칠 후. 내가 기업체로 돌아왔단 소식을 들은 예전 상사 한 분이 반가이 연락을 주셨다.
"왜 돌아와서 연락도 하지 않았어요? 언제 밥 한 끼 합시다."... "아주 좋은 자리가 있는데 내가 급여도 훨씬 많이 줄 수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겠어요?" 감사하지만 입사한 지 몇 달도 되지 않아 자리를 옮기는 건 내키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다.
남편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넌지시 물었다.
"훨씬 많이 준다고? 얼마나?"
나는 답했다. "꿈 깨. 옮기지도 않을 건데 뭣하러 연봉을 여쭤 보냐." 너 답다는 표정으로 웃고 마는 남편이었다. 다른 지원자들을 뒤로 하고 나를 채용해 주신 최종 보스. 현 직장을 위해 당분간 열심히 달리련다. 최종 보스가 나를 등진다면 그땐 나도 미련 없이 새로운 도전을 행하면 된다.
추신:
다음날. 내 욕을 하던 놈이 슬그머니 다가와 업무 자료를 건넸다.
"저기. 선생님. 이 건을 좀 처리하셔야 하는데요."
"네~. 주세요. 처리할게요." 방긋.
넌 앞으로 두 방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