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 지킴이 종신 계약 사건
제가 오랜 시간 다녔던 필라테스 센터의 강사님 한 명은 특정 시간대의 회원들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저는 여 섯 시 그룹 수업을 마칠 때마다 가벼이 손뼉을 치면서 감사합니다 혹은 고생하셨습니다라는 인사를 했습니다. 그러면 옆에 있던 다른 회원들도 따라서 박수를 치며 저와 똑같은 방식으로 인사를 건넸습니다. 선생님은 이런 회원들과 수업 분위기는 어디에도 없다며 소녀처럼 좋아했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오늘 수업 어땠어요?"라고 물으면 우린 또 입을 모아서 "정말 좋았어요."라고 답했습니다. 그녀는 여섯 시 수업의 회원들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역시 나의 자존감 지킴이들!"
피식 웃으며 집으로 돌아가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자존감 지킴이는 누구지?' 단번에 답이 나왔습니다. 내 자존감 지킴이는 우리 남편이지. 자존감은 남이 다독인다고 쉽사리 높아지는 것이 아니고 타인이 손가락질한다고 단번에 무너지는 감정이 아닙니다. 혹자는 자존감은 스스로 지키는 것이지 남에 의해 좌지우지되면 그게 이상한 거라고 말하더군요. 그 또한 틀린 주장이 아닙니다만. 가까이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의 시선과 언행은 우리의 자존감을 높이고 낮추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연애할 때 남편은 칭찬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작은 칭찬에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며 "엥?", "내가? 전혀 아닌데..." 하며 손을 휘젓고 얼굴을 붉혔습니다. 칭찬을 괴롭게 여기는 남편을 보며 다짐했습니다. 칭찬 더, 더, 더 많이 해 줘야지. 저는 습관처럼 칭찬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친구, 동생, 어른, 상대가 누구든 낯간지럽지 않게 칭찬을 잘 건넸습니다. 처음엔 칭찬 듣기를 어려워하던 사람들이 차츰 시간이 지나자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을 보내더군요. 남 칭찬을 그렇게 자주 하며 살아왔는데 정작 나 자신은 칭찬받는 걸 몹시 어색해하고 어려워 한단 사실을 나중이 돼서야 깨달았습니다.
불과 얼마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쩜 피부가 그렇게 맑고 예뻐요?"라는 기분 좋은 칭찬을 들은 저는 당황해서 이렇게 답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요?" 이거 뭐 싸우자는 것도 아니고. 상대방은 "음? 제 눈엔 그래 보여요."라고 답했지만 이미 분위기는 어색해져 버린 상태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제 주변에는 칭찬을 가장한 조언을 하는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넌 지금도 예쁜데 키가 삼 센티만 더 컸으면 진짜 예뻤을 거야." 넌 다 좋은데 어쩌고. 넌 다 좋은데 저쩌고. 내가 가진 좋은 점들은 결국 마이너스 하나에 모두 가려져 버리곤 했습니다. 그러한 칭찬 아닌 칭찬 같은 말들은 긴 시간 내 안에 축적되어 딱딱한 응어리로 굳어졌습니다. 엘리베이터에 나보다 키가 훨씬 큰 여성이 타면 움츠려 들기 일쑤였고 내가 가진 단점에 대한 이야기가 들리면 흠칫 놀라며 얼른 남편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그때마다 남편은 자존감 지킴이가 되어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왜? 난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지금보다 어떻게 더 잘하고 살아?", "네 여자친구 기존쎄지?"(기존쎄 is 기가 심히 센 여자)라는 동네 브라더의 질문에도 조금의 당황이나 고민도 없이 "저는 그런 거 못 느꼈는데요?"라고 답하는 진짜 센 남자가 바로 저의 구 남친이었습니다. "화장 안 해도 똑같이 예쁜데 왜 화장을 해?"이런 말도 안 되는 칭찬을 계속 듣고 살면 외모 콤플렉스가 있던 사람이 점차 마스카라와 아이라인을 버리고, 그다음엔 컨실러를 버리고, 메이크업을 넘어 페르소나를 벗어던지는 기적이 일어나더군요.
세상 많은 사람들이 "너는 이런 점이 별로야."라고 할 때 "내가 좋으면 됐어."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숨 쉴 구멍이자 언제든 비빌 수 있는 노른자 땅이 됩니다. 돌아올 수 있는 따뜻한 품이 있으면 넘어져도 금방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회복탄력성이 생깁니다. 우린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을 듣고 보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도 점점 더 어렵고 복잡해지는 것이겠지요. 더 나은 어른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 곁에는 교수자보다 응원하는 조력자가 필요합니다. 단순하게 사랑하고 자주 칭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훗날 눈감을 때 내가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한테 표현 하나는 많이 하고 살았어 하며 미소 지을 수 있기를. 이젠 나보다 칭찬에 익숙해진 남편은 아내가 여보 대단해, 역시 자기가 최고야, 자기 같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또 있어라는 낯간지러운 말을 건넬 때마다 어깨를 쫙 펴고 이렇게 반응합니다. "그럼. 그럼. 우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