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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기 싫지만 결혼이 꿈이었어요

아주 보통의 부부

by 미세스쏭작가

유교 문화가 팽배했던 시절 어른들의 결혼 생활은 위태로워 보이는 구석이 많았습니다. 억압의 반대편에는 희생이, 우열의 반대편에는 차별이 한 쌍을 이뤄 동행한다는 사실 자체가 권태롭게 느껴졌습니다. 제사를 지내는 날이면 여자 어른들은 새벽부터 밤까지 음식을 만들고 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했습니다. 남자 어른들은 느긋하게 음식을 드신 후에 휴식을 취했습니다. 부엌에서 식사를 마친 여자 어른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직전까지도 손에서 물이 마를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런 풍조는 가정의 작은 지붕 아래에서도 만연히 이어졌습니다. 평생 맞벌이 부부로 살아오셨지만 집안일은 모조리 엄마의 몫이었습니다. 이 모든 게 당연하지 않고 옳지도 않단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땐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반감이 들었습니다.


'누구 좋으라고 결혼을 해?' 그러면서도 배우자 기도는 하루도 빠짐없이 했던 저입니다. 제 안엔 정반대의 결심이 상충했습니다. 결혼을 안 하고 살던지. 최고로 잘해버리든지!

대학생 때 멘토였던 언니와 연극을 보러 갔다가 제 꿈은 후자로 확정되었습니다.


"휘영청 밝은 달밤. 사람이 한 개도 없다. 어디선가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별안간 외롭다는 생각이 들어 자고 있는 마누라를 깨웠다. 그리고 둘이 체조를 했다. 사랑이란? 달밤에 체조하자고 깨워도 미친 척 같이 하는 것."


광수 생각이라는 연극을 보다가 이 대목에서 별안간 언니와 나 둘이서 동시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좋다. 그렇지?" 저는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제가 꿈꾸던 결혼 생활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손 잡고 달밤을 거닐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나고 싶다. 만날 수 있을까?


'평생 함께 산책할 수 있는 사람. 같은 곳을 바라봐 줄 사람. 그거면 된다.' 욕심 없이 작은 소망 하나만을 바랐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살아 보니 이게 다이고 이런 게 바로 인생의 별미더군요. 나의 속이야기를 언제고 할 수 있는 사람, 내 마음을 듣고 헤아려 주는 사람이 늘 곁에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활력소가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 부부는 요즘 일주일에 세 번 이상 함께 산책을 즐깁니다. 건강한 다리로 함께 공원을 달리기도 하고 한적하게 걸으며 밤공기를 마십니다.

"날씨 좋다. 상쾌하네."

"응. 짱 좋은데?" 실없는 대화를 나누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충만한 행복 덤입니다.


휘영청 밝은 달밤을 남편과 함께 거닐면 대학시절에 봤던 연극이 떠오릅니다. 물론 잠든 남편을 깨워서 달밤에 체조하러 나가 본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습니다만. 그가 제게 청하거든 언제고 눈 비비고 일어나 따라나설 참입니다.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들과 쓴 기억들을 보약으로 달여내기까지 많이 휘청거렸고 괴롭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사랑을 소망하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다듬어 나가길 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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