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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이 싫어하는 바로 그 행동

특정 표정과 말투

by 미세스쏭작가

이십 대 초반엔 '설렘'이 사랑의 전부라 생각했습니다. 설렘이 없는 사랑은 끝난 것이라고 판단했을 정도입니다. 삼십 대 후반에 접어든 지금은 사랑을 '받아들임'이라 정의하게 되었습니다. 좋고 싫음을 떠나 상대의 장단점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것.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면 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이 나와 너 곧 '우리'의 것이 됩니다. 예를 들면 저는 남편을 사랑하고 마음의 안정과 행복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와 더불어 널브러진 빨랫감과 요술처럼 쌓이는 그릇들과 물이 뚝뚝 떨어지는 칫솔, 내 눈에만 보이는 무한한 일감도 얻었지요. 남편 역시 저를 사랑한 대가로 많은 답례품(?)을 얻었습니다.


악마가 쓴 편지로 이루어진 책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는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두 인간이 오랜 세월 함께 살다 보면 서로 거슬리는 말투나 표정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 점을 노려야 해. 네 환자는 어머니가 눈썹 추켜올리는 표정을 어렸을 때부터 몹시 싫어했으니, 바로 그 표정을 환자의 의식 속에 최대한 부각하면서 그게 얼마나 꼴 보기 싫은지를 일깨워 주거라. 그리고 자기가 그 표정을 싫어한다는 걸 어머니가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그런다고 믿게 하는 거야. 자신에게도 어머니의 기분을 거슬리게 하는 표정과 말투가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일랑 행여라도 품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거라. 환자는 자기 표정이나 말투가 어떤지 잘 모르니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게야."


인간을 악마의 편으로 만드는 무기가 참으로 유치하고 강력하여 쓴웃음이 나왔습니다. 특정 말투나 표정만 잘 이용하면 오랜 세월 함께 산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 있다고 악마는 주장합니다.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주목하는 나의 표정과 말투는 무엇일까 떠올려 보았습니다. 배우자가 싫어할 만한 나란 인간의 마이너스 모먼트를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부모님께서 싫어하시는 딸의 표정, 내 형제들이 싫어하는 나의 모습 또한 잘 알고 있지요. 차마 내 화장대 거울로도 보고 싶지 않은 일그러진 표정과 퉁명한 말투들을 영영 떨쳐 버리고 싶단 생각이 듭니다. 우리 모두는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심어놓은 무기 하나쯤을 가지고 살아가는 듯합니다.


악마의 작전은 이러합니다. 상대의 짜증 나는 말투와 표정을 발견할 때마다 각별히 주의하여 자신에게도 그런 면이 있음을 눈치채지 못하게 할 것. 역설적으로 여기에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지켜 내는 힌트가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교묘하고 치명적이며 오래된 단점을 인지한 채로 살아갈 것. 단점의 강도를 줄여나가되 실수하거든 상대방에게 냉큼 손을 내밀 것.

아홉 번을 잘하고 단 한 번 잘못했을 때야 말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넌 왜 내가 잘못한 것만 기억해?" 따지지 말고 "나한테 그런 면이 좀 있지? 속상하게 해서 미안해."라고 시인하면 악마의 무기는 천사의 도구로 변화합니다.


요즘 들어 상대의 단점이 부쩍 거슬린다면, 그냥 무작정 사랑해 줬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든다면 조명이 환한 거울 앞에 서야 할 때입니다.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아끼는 몹쓸 표정과 말투를 직접 보고 들으며 적나라한 거울요법을 시행해 봄이 어떤지요. 화질 뛰어난 카메라로 찍어서 직접 확인하면 두 번은 보기 괴로운 영상이 탄생하리라 장담합니다.

내 뜻을 강하게 주장하고 싶을 때마다 사탄이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떠올리려 합니다. 찍어 누르는 듯한 딱딱한 말투와 기분 따라 올라가는 모난 입꼬리를 뜨거운 사랑으로 소각하고 싶습니다. 곰삭은 릇은 악마에게 양보하고 배우자에게 점수 좀 따야겠습니다. "배우자 님. 저를 늘 사랑으로 보듬어 주셔서 고... 곰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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