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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B Oct 20. 2020

헤어진 후 처음으로 그를 본 날

워낙 작은 도시기에 언제고 마주칠 일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 날 전남편을 마주친 건 예상 밖이었다.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 따라 검은 비옷을 입고, 모자까지 둘러쓴 나에 비해 그는 잘 다린 하얀 셔츠를 입고 저 멀리서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그가 가까워지면서 나를 알아채고 얼굴 표정이 굳어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얼굴엔 희미한 미소가 띠어 있었지만 불편한 마음에서 억지로 지어낸 표정이라는 걸 눈치채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를 마주친 날의 노을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과거는 더 이상 아픔이 되지 않는다. 과거에 대한 집착으로 현재를 오롯이 즐기지 못하는 실수는 하지 않을 거다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수없이 이 순간을 상상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궁금한 건 그가 아니라 그를 봤을 때 나의 반응이었다. 그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또 눈물을 흘릴까 아니면 고함을 지르며 악쓸까. 상상 속에서 나는 그를 모른 척하며 지나가는 게 대부분이었다. 현실이 되어 실제로 그 현장에 서자 결과는 놀라웠다. 무수히 반복되었던 추측과는 달리 나는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분노, 슬픔, 절망 혹은 사랑, 그 어느 것도 해당되지 않았다. 내 앞에서 어색하게 서있는 이 사람은 언젠가 알고 지낸 적이 있으나 내 인생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은 스쳐간 지인으로 보였다.


이년 전에 비해 흰머리가 많이 난 그가 옅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잘 지냈어?"

" 응. 잘 지내지. 너는 참 많이 늙었네. 잘 지내."


다시 가던 길을 걷기 시작하는 순간, 가슴이 벌렁벌렁 뛰기 시작했다. 그건 ‘그가 정말 내 과거가 되었구나. 그에게 휘둘리던 나는 이제 없구나.'라고 깨달음에서 나오는 전율이었다.


일 년 전쯤 T에게 전남편에 대한 울분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T는 내가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아직 그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는 것이 아니냐며 오히려 나를 나무랐다. 나는 T가 내가 겪은 일을 모르기 때문에 나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든 나와 같은 일을 겪으면 시간이 흘러 사랑이란 감정이 사라지더라도 분노는 남아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를 마주하자 이제야 T의 말이 온전히 이해가 되었다. 그는 나에게 분노를 느끼게 할 가치조차 남지 않은 과거가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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