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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호 Aug 05. 2017

술과 잠수종과 나비

음주일기飮酒日記

Day_1

술에 대한 글을 쓰려다 술만 마셨다.

취한다. 오늘도 활자를 끄적이긴 글렀다. 그냥 마셔야겠다.



Day_2

술병과 술잔을 옆에 놓고 노트북을 열었다.


노트북이 미지근하게 데워지는 시간보다 술잔을 비우는 시간이 더 빠르다. 취한다. 눈꺼풀 깜박임으로 쓰인 책 <잠수종과 나비>처럼, 술잔 기울이는 것으로 단편 소설 한 편 쓸 기세다. 20만 번의 술잔 기울임은 아니지만 말이다.


비틀스Beatles의 ‘A Day in the Life’를 유튜브에서 찾아 플레이한다. 장 도미니크 보비Jean-Dominique Bauby가 교통사고 직전에 듣던 노래다. 노래를 들으니 뜨끈한 취기가 올라온다. 진득한 피가 허벅지로 흘러내리는 것처럼 알코올이 몸속에서 흐느적거린다. 꼬냑을 베이스 삼아 섞어 만든 칵테일 같은 노래다. 물론 꼬냑을 베이스로 잘 삼진 않지만, 있다면 한 잔 마셔도 좋을 기분이다.

버번을 따라 마셨던 온 더 락 유리잔 표면이 땀을 뻘뻘 흘려 검은 책상이 젖었다. 검은 책상에 흘린 물이라 까맣다. 노트북에 물이 닿기 전에 닦아야지,라고 생각하며 티슈로 휘휘 저어 닦아 젖은 뭉탱이를 보면 그저 하얀 티슈다. 그저 투명한 물이다. 눈에 비치기에만 그랬다.

 


Day_3

오늘은 얌전히 와인이다. 덜 취하면 좀 끄적일 수 있을 것 같다.


교통사고가 나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였다. 수술을 마치고 재활치료를 하기 전까지 휠체어를 탔다. 살면서 휠체어를 타게 될 줄이야. 수술한 두 다리를 쭈욱 뻗을 수 있게 발받침을 길쭉하게 늘려놓고, 침대 위 링을 체조 선수처럼 바들바들 붙들고, 휠체어로 몸을 옮긴다. 진즉 팔 운동 좀 할 걸. 별거 아닌 이동에 괜한 최선이다. 암튼, 그래도 좋았다. 누워서 창 밖만 바라보는 것보다 휠체어를 타고 50m 정도 되는 복도를 돌아다니는 게 더 나았다.


그렇게 한 달 즈음 지나던 7월 여름밤, 비가 왔다. 순천향대병원 6층에서 바라보는 비 오는 한남동 풍경은 휠체어를 탄 환자에게도 감성을 투하한다. 이러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하지만 술 땡긴다. 아프다고 욕구까지 아픈 건 아니었다. 쌉싸름한 말벡Malbec 와인이 땡겼다.  

 

프랑스 엘르Elle 편집장이었던 장 도미니크 보비가 쓴 <잠수종과 나비>를 읽었다. 그는 교통사고를 당하며 뇌출혈로 감금 증후군Locked-in syndrome에 빠진다. 그는 온몸이 마비된다. 

신경이 살아 있는 한쪽 눈꺼풀을 깜박여 쓴 보비의 글을 봤다. 사고가 났던 6월이 떠올랐다. 그 날, 두 다리와 심장 대동맥, 코와 눈 두덩이가 너덜 해졌다. 그때, 무슨 옷을 입었지? 기억이 안 난다. 피를 막고 늘어진 몸을 옮기느라 자르고 찢겼으리라. 옷은 기억 안나도 축축이, 뜨끈히 느껴지던 피의 감각은 아직 선연하다. 당시를 떠올리면 얼음 없이 부커스Booker’s(내가 제일 좋아하는 버번이다)한 잔 입 안에 털고 싶지만 활자를 끄적여야 되니, 일단 와인 한 모금 만. 입 안에 굴러들어 온 와인은 병원에서 마시고 싶었던 그 말벡이다. 취한다. 이럴까 봐 위스키 손 안 대고 와인 마셨는데, 에이, 오늘도 글렀다. 그냥 마셔야겠다.

 


Day_4

맥주는 역시 4개 만원 짜리 수입 맥주다.


꺼내 놓으면 이 녀석도 땀을 뻘뻘 흘린다. 뜨끈한 방 안의 공기와 충돌한 캔맥주 냉기는 미지근한 검정 물을 남긴다. 책상이 검정이라 흘러내린 물기는 늘 까맣다. 물기를 한 번 스윽 닦아주고 두 모금 크게 삼킨다. 가장 맛있게 맥주를 마셨던 때를 생각한다. ‘휠맥’이다. 병원에 면회 온 친구가 끌어준 휠체어를 타고 삼겹살 집에 갔다. 병원 밥은 물린다. 불덩이에 익힌 미끄덩한 삼겹살을 입 안에 던져놓고 갓 꺼낸 맥주를 목구멍에 들이붓는다. 취한다. 환자복 입고 휠체어 위에서 마시는 맥주는 이 맛이구나. 약해진 몸 상태라 한 잔의 맥주에 얼굴이 버얼개졌다.

 

‘잠수종이 한결 덜 갑갑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면, 나의 정신은 비로소 나비처럼 나들이 길에 나선다.’

 

‘잠수종’에 갇혔다는 표현을 쓴 보비의 감정이다. 그의 고통과 감정까지는 모르겠지만 <잠수종과 나비>에서 ‘나비’의 기분은 조금 알 것 같았다. 동그란 스댕 탁자 위 맥주는 땀을 뻘뻘 흘린다. 동그랗고 은빛이 도는 스댕 테이블 위에 맥주병에서 흘린 물기가 흐른다. 은빛 물이다.

 


Day_5

최애最愛 식당인 충무로 ‘진고개’에서 곱창전골을 시켰다.

 

참이슬이건 처음처럼이건 상관없다. 휠체어를 끌어준 친구랑 소주를 마신다. 취한다. 글은 나중에 적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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