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위는 던져졌다

플란다스의 개 다시 보는 남자 #8

by 김현호

철물상 아저씨 지인 :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파트라슈가 멀쩡한 걸 보면 당장 내놓으라고 할 거다.

조르주 : 그치만, 그 아저씨가 버렸잖아요! 이제 와서 내놓으라니요?!

철물상 아저씨 지인 : 그 남자는 그런 상식이 통하는 인간이 아니거든.


네로는 철물상 아저씨가 학대하고 버린 파트라슈를 거두어 보살핀다. 기운을 차린 파트라슈를 데리고 네로와 친구들은 앤트워프로 향하는데, 도착한 마을에서 파트라슈를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난다. 그 아저씨는 파트라슈 주인이었던 철물상 아저씨의 지인이다. 당황하는 네로에게 아저씨는 자신도 파트라슈 편이라며, 학대당하고 보살핌 받지 못한 파트라슈를 가엾게 여겼다고 말한다. 아저씨는 앞으로 사랑만 듬뿍 받고 지내라고 말하며 철물상 아저씨를 마주치지 말라는 당부를 한다.


네로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표정이다.

루비콘강을 건너 이탈리아로 진격하던 카이사르의 결의에 비견할 만하다. 파랗고 투명한 눈동자가 또렷해진다. 이제 네로는 파트라슈의 보호자다. 법보다 펀치가 먼저인 철물상 아저씨의 횡포로부터 자신과 파트라슈를 지켜내고자 한다. 어린아이지만 놀라운 신념이다. 나도 저렇게 뚜렷한 신념을 가져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물냉면과 비빔냉면, 라떼와 아메리카노 사이에서 선택 장애를 겪는 나를 되돌아봤다.


오랜만에 거울 속 내 모습을 곰곰이 살펴봤다. 이 점은 도대체 언제 생긴 거지? 눈가가 푹 가라앉았군. 휴. 그동안 신경 못 써서 미안하다 얼굴아. 어느 교육감 후보가 유세현장에서 딸에게 “미안하다!”를 부르짖듯 내 얼굴에게 미안하다 외쳤다.


네로의 파랗고 투명한 눈동자와 달리 내 흑갈색 눈동자는 경계가 희미했다.



비단 신경 못 쓴 건 얼굴뿐이 아니었다.

현실의 횡포에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유기해버렸다. 무취미가 취미가 되었고, 누군가의 전문화된 취향에 내 취향을 맞추고 있었다. 철물상 아저씨가 방치한 파트라슈처럼 나도 내 주관을 방치했다. 이제 와서, 내 주관과 취향 어딨어,라고 묻는 건 철물상 아저씨의 몰상식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네로의 입장에서 ‘플란다스의 개’를 보다가, 어떤 부분은 내가 못된 철물상 아저씨의 방향에 서고 있다 생각하니 뜨악했다. (술 마시고 얼굴 벌게져서 돌아다니는 건 좀 닮긴 했다, 인정)


나의 몰취향적 취향을 돌아봤다. 사과 폰에 사과 패드, 사과 노트북, 걸치고 있는 SPA 브랜드 옷과 나도 좋아하고 남들도 좋아하는 명품 액세서리 몇 개, 승리의 여신(니케, 영어로는 나이키다) 로고 운동화에, 런던에서 조씨 성을 가진 여사님이 만들었다는 말론 향수… 내가 좋아한다고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로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홍수를 겪고 난 여울의 물줄기처럼 취향의 갈래는 이리저리 흩어져있고, 주관은 어디론가 휩쓸려 가 있었다. 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들인데…?라고 생각했지만, 왜 좋아하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좋아 보이고, 남들도 좋아해서, 많이 찾아서 그랬던 게 아니었을까.



그나마 어렵사리 나만의 취향이랄 걸 찾았다.(휴, 다행이다) 블록버스터, 대중 영화도 좋아하지만 제 3세계 영화나 독립영화를 찾는 취향이다. 그런 의미로 광화문 근처에 있는 예술영화 전문 극장 시네큐브는 정말 아끼는 공간이다. 처음부터 작은 규모의 영화나 예술 영화를 좋아하진 않았다. 이 취향이 탄생한 이유는 대학생 시절 알바를 하던 장소가 시네큐브 바로 옆 패밀리 레스토랑이었기 때문이다.


일하러 왔다 갔다 하면서 자주 봐왔던 장소여서 자연스레 발길을 향했다. 탄산음료도, 팝콘도 반입이 안 되는 이 공간은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극장의 불을 켜지 않는다. 아, 문화충격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쇼트트랙 선수가 마지막 바퀴를 돌 때처럼 잽싸게 튀어나갔던 지난날의 영화 관람과 다른 문화였다. 단지 일하던 곳과 가깝다는 이유로 자주 드나들었고,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봤다. 지극히 사소한 이유로 생성된 취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다른 취향과는 남달리 소중히 여기고 있다.


철물상 아저씨 : 어! 파트라슈…! 역시 너 파트라슈 맞지? 이 녀석 거기서!


앤트워프에서 철물상 아저씨와 마주친 네로와 파트라슈는 부리나케 골목으로 도망친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 넘치는 장면이다. 네로와 파트라슈는 준비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맞닥뜨려야 했던 순간이다. 네로는 도망친다. 일단 도망이 최선이다. 하지만 철물상 아저씨와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나의 몰취향을 알고 나서야 진짜 내 취향이 무엇이었는지 찾아보게 되었다. 아무 준비 없이, 이제 나만의 취향을 찾아야지,라고 할 수 없어서 그동안 살아오면서 좋아했던 일들을 되짚어 봤다. 아주 작지만 즐거웠던 일을 찾고 그것을 다시 해보는 일을 하려 한다. 중심 없이 흩어지던 취향의 물줄기를 다시 모으고 있다. 어느 정도 가닥이 보이면, 이게 제 취향입니다,라고 말하려 한다.

일단 도망갔다가 정리가 되면 취향의 전선으로 나가야지.


나도 주사위를 던졌다.





Ps. 유기견 관련 질의응답을 찾아봤다.


Q : 유기견을 데려다 키우면 절도죄인가요?

A : 절도죄는 원주인(피해자, 유기견 주인)의 관리 가능한 범위에 있는가 등의 종합적인 판단이 필요합니다. 주인이 유기견을 찾을 수 있는 범위 내 정도로 보심이 타당하고, 이에 더하여 유기견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귀소본능을 참작해야 합니다. 또한 유기견 목줄에 주인의 연락처가 기재되어 있는지는 중요한 사안이 됩니다. 따라서 절도죄와 점유이탈물 횡령 등의 법을 적용받을 수 있는 여지가 있으나, 이는 현실성이 다소 떨어지는 사례로 보입니다. (강력팀 형사 ‘지식IN캅’님 답변)


결론은,

절도죄가 아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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